매거진 소소하다

벚꽃엔딩

4월 공통주제 <봄> ㅣ 김아소

by 한공기
KakaoTalk_20160210_162630761rebw.jpg 비목표지향적 프리터
난 이제 이 길을 걷는 게 처음처럼 신나지 않는데, 굳이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도 없는데, 이만큼 했으면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지 뭘, 그들은 목표지향적 인간, 난 되는 대로 사는 인간, 목표가 없으면 어때, 내가 이 길이 좋으면 그만큼 좋아하면 되는 거야.


작가 프로필 ㅣ 김아소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던 암기과목 성적은 언제나 중간 아래에서 허우적댔고, 못하는 걸 더 잘해보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다. 대신 흥미를 느끼는 종목은 그것이 운동이건 공부건 사진이건 혹은 (어쩌다!) 일이됐건, 항상 시작점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선 기량을 보였고, 선생님, 상사에게 잘한다 소리를 들었으며 뒤쳐져 있던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흥미 있던 몇몇 과목이 다행히 국영수여서 별 노력 없이 입시를 지나칠 수 있었고, 아직까지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젠 좀 그만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일 년 중 사분의 일을 같은 노래만 지겹게 들어야 할 줄 알았다면, 슈스케 3 시작할 때 예리 밴드의 이탈로 버스커버스커가 갑자기 합류하는 사태를 온몸으로 막아보는 건데. 물론 내가 막는다고 바뀌었을 리는 없겠지만. 더 무서운 건 이 노래를 적어도 십 년은 더 듣게 될 것 같다는 끔찍한 예감이다. 노래가 싫지는 않다. 담백한 목소리와 과장 없는 표현은 충분히 듣기 좋았다. 단지 좋은 것도 몇 년씩 반복하다 보면 지겨워질 뿐이라는 사실이 징그러웠을 뿐이다.




재희와 난 우리 학번의 유이한 여자 멤버이자 끈끈한 협력자인 동시에, 워크샵부터 네 번의 정기공연에 배우로 함께 무대에 섰고, 같은 배역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 경쟁을 해야만 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모든 경쟁의 승자는 항상 재희였다. 재희는 그 다섯 번의 공연에서 주연을 따냈다. 내가 잠자코 앉아서 대본과 씨름하는 사이, 재희는 연출을 찾아가고 선배들을 만나며, 자신이 얼마나 이 역을 따내고 싶은지 적극적으로 피력했고, 또 그 욕심만큼이나 열심이었다.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가 별로 안 보였을 나는 도무지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 절망적 깨달음 이후, 나는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데 대한 미련을 버렸다. 대신 무대를 만들고, 의상을 제작하고, 배우들 위로 조명을 뿌려주며 다음 공연을 기획했다. 그 사이에도 재희는 쉼 없이 무대에 올랐고, 모두 주연이었다. 그녀의 사전에 예외는 없었다. 5년에 한 번씩 있는 동문 합동 공연에서조차 쟁쟁한 동문 선배들을 제치고 주연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을 땐, 그녀의 집중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극회 역사상 전례 없는 기록이었다. 이쯤 되고 나자, 이 이목구비 커다란 장신의 노안 동기에게 내가 캐스팅에서 이길 방법은 애초부터 없었겠구나 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 학교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하신 재희의 부모님은 금지옥엽 막내딸이 졸업 후에도 연극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울까 봐 노심초사하셨지만, 재희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부모님께 지키지 못할 맹세를 하고 무대에 오르곤 했다. 그리고 그 '이번이 마지막'은 올해 동문 합동 공연에서도 또 쓰여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그녀는 벚꽃동산의 주인공 '라네프스카야' 역을 따냈다.


재희가 전화했을 때 나는 시큰둥했다. 이번엔 친한 선후배들이 많이 참여하니 한 번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선후배 중에 편하게 지낼만한 사람이 없으니 네가 와주면 힘이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첫날 대본 리딩에 참석했을 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리딩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본이고, 존경하는 연출이었다. 그녀의 권유나 의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주연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라네프스카야는 벚꽃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였고, 직장인인 나는 매일 퇴근하고 한 시간씩 걸려 학교로 가,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스케줄만으로도 버거울 터였다. 라네프스카야처럼 감정 변화를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를 만들고 소화하기엔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그리고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벚꽃동산에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내가 무대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캐릭터를 맡는다면, 분량이 많고 적고를 떠나 즐겁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늦겨울과 초봄 동안 우리는 정말 신나고 즐겁게 연습했다. 10년 만에 무대에 오를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슬며시 웃음이 배어나오곤 했다. 퇴근하고 학교로 달려가 11시까지 연습하고 나서 집에 오면 바로 씻고 침대에 들어가도 새벽 1시였다. 주말을 모조리 반납해가며 2달 동안 다크서클을 달고 살았지만, 몸이 힘들고 피곤해도 즐거운 일을 하고 있으면 그게 힘들다고 느끼지 못한다. 사실 공연이 끝날까 봐, 다시 이 사람들과 이런 시간들을 나누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울 정도였으니 제대로 미쳤던 게 분명하다.


공연 한 달 전, 오랜만에 연습이 없던 날 그동안 소홀했던 독서모임에 오랜만에 참석했다. 몇 달 만에 나간지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뒤풀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소개를 나누고, 술을 몇 잔 걸친 상태에서 한 남자 회원과 함께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그는 자신을 심리 상담사라고 소개했다. 자신이 심리상담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걸 '독심술사' 쯤으로 해석해서 곤란하다며 웃었다. 자기는 주로 얘기를 들어주고 약간의 조언을 할 수는 있지만 보통 상담을 하는 사람들 자신이 해답을 알고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며 미소를 머금은 채, 내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했다.


그가 우리 테이블로 옮겨와 내 근처에서 자리를 지키고, 내가 하는 얘기들을 유심히 들어가며 반응해주고, 밖으로 나올 때 따라나오는 걸 보고는 이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나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다음 순간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상상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목련 알죠?"


"네, 알죠."


"목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하필 목련이 필 때, 벚꽃이 같이 피고 지거든요. 사람들은 벚꽃의 화려하게 흐드러지는 광경에 눈이 팔려서 목련은 알아보지도 못해요. 그런데 가볍게 흩날리는 벚꽃에 비해서 목련은 중심을 잡고 우유처럼 하얀 꽃잎을 묵묵히, 어쩌면 좀 처연하게 피워내거든요. 누가 봐주던 그렇지 않던가에 관심 따위 주지 않고 그렇게 고고하게 아름다움을 내뿜는 거예요."


"하-"


이건 뭐란 말인가. 난 그에게 '벚꽃동산'이라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가 아니라 그 모임에 있는 다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으니 이 사람이 그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졌을 리는 없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다니, 하필 벚꽃과 목련이라니,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냥 그런 느낌이에요, 다은씨는. 남들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피어 있는, 기대 없이 골목을 돌았다가 마주했을 때 숨 막히게 만드는 목련 같은 느낌."


세상에. 이런 작업 멘트는 정말 신선하다. 아니, 잠깐 정신이 혼미해질 뻔했다. 심리상담사가 독심술사와 동일어임은 이걸로 분명해졌다. 물론 내가 뻔뻔하게도 나 자신을 목련 같다고 생각해왔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지금 벚꽃동산을 준비 중이고, 재희가 맡고 있는 라네프스카야는 벚꽃동산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재희는 함께 동아리 생활을 해오는 내내 벚꽃처럼 흐드러지게 무대에서 빛났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멘트라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조명이 어두워서 당혹감에 불타오르는 얼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 얘기는 생전 첨 들어봐요."


"우리 다음에 또 봐요."


그는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나는 악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대충 손을 휘저었다. 그리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빛의 속도로 화장실로 직행해 붉어진 얼굴이 식기를 기다려야 했다.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봄도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매회 공연을 지날 때마다 제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올봄은 인생의 어떤 순간들보다 행복한 나날들로 기록될 것 같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지겨워지기 전에 벚꽃은 끝나버리고, 이젠 지나는 거리마다 '봄이 좋냐'고 물어 온다.


그래, 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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