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2. 벌레들

단편 소설의 맛 ㅣ 김애란의 <비행운>

by 한공기

김애란의 단편소설 <벌레들>은 매우 불편한 소설이다. 최근 국내 상영중인 영화 <곡성>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꺼림칙한 기분을 자아낸다. 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오컬트 무비 <악마의 씨>나 카프카의 <변신>이 연상되기도 한다. <곡성>, <악마의 씨>, <변신> 세 작품의 공통점이 뭘까 고민해보았다. 신화적이고 주술적이고 악마적이고 판타지 한 요소가 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과 독자를 주인공의 불안한 내면 심리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벌레들>을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 온몸이 아파왔다. 책을 읽은 그날 밤 잠자리에서는 몸이 근지러웠고 결국 악몽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소설을 읽었는가 깨달았다.




원래 '공포'라는 것은 도망칠수록 더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하고 직면할 때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그래서 가방 안에 처박아 두었던 김애란 단편집을 다시 꺼냈고 <벌레들>을 찾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고문서를 분석하는 고고학자처럼 문장과 단어 속 숨은 의미와 맥락을 파헤쳤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낭독회 회원들과 나누었던 생각을 기반으로 내 개인적 <벌레들>의 연구보고서이다. 그러고 보니 왠지 내가 곤충학자 파브르가 된 기분이 든다.


1. 장미빌라 _ 욕망의 경계


대한민국에서 집이란 '욕망'의 상징이다. 그래서 누구나 좋은 집에 사는 것을 꿈꾸는데 한국사람들에게 좋은 집이란 평수가 넓은 아파트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주공간 장미빌라는 참 나쁜 집이다.

낮은 언덕을 깎아 만든 절벽 위에 지어졌고, 우편함은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듯 무척 녹슬어 있고, 층간소음이 심해 나의 발소리가 크다고 밑에 집 총각이 찾아오기도 한다. 때론 아파트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폭력의 기운을 수시로 느낀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구타하는 소리, 비명소리가 들린다.) 창밖의 4차선 도로의 소음도 한몫을 한다. 그래도 가끔 생선 굽는 냄새나, 축구경기를 보며 울려 퍼지는 주민들의 함성소리, 아기 울음소리, 택배기사의 목소리 등 인간냄새가 풍기기도 하고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는 화분의 고요한 휴식을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집 밖 외부 공간과 집 안 내부 공간은 전체적으로 불. 안. 하. 다. 절벽 밑의 재계발 구역이 한눈에 잘 보이는 커다란 창은 햇빛이 잘 들어 좋지만 창에 걸친 방충망은 오래돼서 떨어질랑 말랑하고, 집안 곳곳에 스며든 곰팡이와 악취, 온수도 잘 나오지 않아 샤워를 할 때마다 수도꼭지에서 손을 못때고 계속 조절을 해줘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집 안 곳곳에 벌레가 들끓어 벌레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주인공과 그녀의 남편에게는 신혼집 이후 두 번째 집임에도 여전히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최선의 선택이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 둘은 이사오자마자 온갖 세제를 동원에 집안 곳곳을 소독하고 청소한다.


401호는 과다하게 뿌려진 산성 세제에 푹 절어 있었다. 걸레질을 하는 남편과 내 얼굴에서 콧물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냉장고와 싱크대 청소, 창문 다 닦기, 현관 정리 등 자잘한 일을 해치우고 나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우리는 쓰레기봉투를 묶고, 손을 씻고, 물을 마셨다. 그러곤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약속이나 한 듯 싱크대에 몸을 기대 서둘러 몸을 섞었다.


- 김애란의 <벌레들> 중에서-



이 문장은 이 소설의 중요한 서막과 같다. 낡은 환경에 처한 부부는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집안 전체를 표백하고 그 독성 화학 물질로 이루어진 공기 속에서 아이를 갖게 된다. 이후 그녀의 몸은 새로운 생명의 집이 되어간다. 문제는 그녀가 시종일관 불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집도 그녀의 몸도 온통 불안하다. 그녀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대상은 절벽 밑의 잡초가 무성한 재개발 구역이다. 중학교 운동장 두배 정도 되는 그곳은 부직포로 된 가림용 천막 안에 있어 고립되어 보인다. 아직 남아있는 정착민들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천막집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는 크고 오래된 나무가 있다. 마치 그 구역의 정령 신같이 보인다. 그곳은 도시 속의 원시림 같고 그곳 사람들은 원시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가난하지만 그곳 사람들보다는 높은 신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그곳을 내려다본다. 베란다에는 선인장, 페퍼민트, 산세베리아 같은 향 좋은 식물을 키우며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베란다 너머의 원시림에서 자꾸 올라오는 벌레들 때문에 노이로제와 우울증이 걸린다.


자 이 구도를 살펴보자. 장미빌라와 재개발 구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벌레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 소설은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순을 말하고 있다. 낙후된 장미빌라에 사는 그녀는 언젠가 이사할 '자이'나 '래미안'같은 좋은 집을 꿈꾼다. 동시에 재개발 구역을 경계하고 혐오한다. 어쩌면 장미빌라는 끝없이 욕망의 계단을 오르는 우리의 현실을 상징한다. 즉 장미빌라는 경계에 놓여있다. 여기서 벌레는 그런 우리들에게 '불편한 존재'를 상징한다. 노숙자, 하층민, 이주노동자... 우린 그들을 카스트의 가장 밑 단계인 '불가촉천민'을 대하듯이 본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원래 상승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하층에서의 도피 성향도 강하다. 그녀의 집안에 침투하는 '벌레들'은 그녀가 그토록 도피하고 싶은, 노예와 다를 바 없음을 자꾸 상기시킨다.


2. 자본주의의 원동력 _ 이기주의


"오빠, 나 저 소리들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이 집을 택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남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난 괜찮은데."

"오빠는 주로 밤에 들어오잖아. 나는 종일 집에 있어야 된다고."

"라디오를 좀 들어봐. 그럼 괜찮아질 거야."

"내가 원하는 건 다른 소리가 아니라고. 그냥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상태, 그뿐이라고."

정말 그랬다. 고요는 오존층처럼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투명한 막 같은 거였다. 물이나 햇빛처럼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그런데 차 소리가 그걸 자꾸 찢고 들어왔다.

"흠 없는 집이 어디 있어. 조금만 참고 살아보자. 내 친구는 30평대 아파트에 사는데 거기도 비행장 근처라 문을 못 열어둔대."

남편의 무능을 탓하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말은....."

"나중에 좋은 데로 옮기자. 좀 더 절약해서. 그땐 아이도 낳고......"

남편은 슬며시 내 가슴을 더듬었다. 나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손에 힘을 주자 젖멍울이 아려왔다.

"할까?"

나는 몸을 완전히 빼지도 맡기지도 못한 채 머뭇댔다.

"싫어?"

남편이 눈치를 봤다. 그래도 눈동자엔 조르면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오빠."

"응?"

"나 요새 생리를 안 해."

순간 남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뭔가 끔찍한 걸 목격한 듯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 김애란의 <벌레들> 중에서-


'노예'의 정의는 무엇일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노예'라는 단어는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이제 '노예'란 '이성이 없이 위장과 성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하복부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가 아닌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다.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불행한 것이고 그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 소설이 불편한 것이다.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편함은 더 증대된다. 이마트에 가면 장을 보는 많은 부부들을 본다. 카트와 카트들이 경쟁을 하며 많은 상품들을 카트에 싣는다. 모두에게는 그저 하루의 일상에 불과하지만 그 평범성은 한국 사회 기저에 깔려있는 '집단 이기주의 > 가족 이기주의 > 개인 이기주의' 도미노 현상 맥락과 일맥상통한다. 우린 어려서부터 '경쟁'이란 하나의 원근법에 갇혀 살았다. 기업과 기업은 경쟁을 하며 덩치를 키우고, 개인과 개인은 경쟁을 하며 보다 큰 회사에 입사를 꿈꾼다. 타인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내가 필요한 타인은 오직 나와 결혼할 이성이다. 그렇게 짝짓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은 자연스럽게 가족이기주의 원리 속에서 굴러간다. 다른 가정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우리 가족만 잘되면 그만이다. 이기주의의 방향성은 결국 집단에서 개인으로 쏠린다. 그래서 가족 안 구성원들은 서로를 인정하며 소통하기보다 서로를 소유하려 싸우게 된다. 때론 이용 가치가 없는 가족 구성원은 소외되기도 한다. 심지어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말이다. <벌레들>에서도 주인공의 남편은 그녀가 임신한 후부터 야근이 잦아진다. 심지어 산달이 가까워 온 시기에도 좀처럼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한다. 그녀는 남편이 혹시 바람을 피나 의심하지만 설마 그럴리가 없다며 그가 자신에게 선물했던 '결혼반지'에 집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은 '장미빌라'처럼 경계에 놓여서 방황하고 갈등한다. 위 내용에서도 남편이 섹스를 조를 때, 몸을 완전히 빼지도 맡기지도 못한 채 머뭇댄다. 어쩌면 그런 수동적인 태도가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의지가 없으면 우린 그저 상황에 몸을 맡길 뿐이다. 즉 우리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려면 개인의 '의지'가 필요하다. 혹자는 '욕망'이나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 아닌가? 묻기도 한다. 심지어 '경쟁과 계급사회'의 원근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내몰리기도 한다. 거기에 어떤 대꾸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모든 삶의 선택은 개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단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이 속한 원근법 속에서 당신은 얼마나 지속 가능할 수 있는지?'

'당신이 속한 원근법 속에서 당신은 정말 행복한 것인지?'


어쩌면 우린 그 원근법 속에서 탈출할 때 비로소 노예에서 해방될지 모른다. 하지만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우린 막연하게 그 안에서 계속 견디고 있다. 여전히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하면서...


장마가 지속됐다. 큰비는 세계를 집어삼킬 듯 열흘이나 계속됐다. 어쨌든 견뎌내야 했다. 모두가 글고 있으니까. 모두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까.


- 김애란의 <벌레들> 중에서-


3. 생태주의


오늘내일 애가 나올지도 모르는 여주인공은 혼자 집에서 잠든다. 남편은 오늘도 야근이란다. 온갖 잡생각(공과금 납부, 세탁물 찾기, 펀드...)에 잠을 못 이루다가 이상한 소리에 일어나 집안을 살펴본다. 방충망에 커다란 애벌레를 발견하고 경악을 한다. 징그럽게 생긴 그 벌레를 죽이기 위해 곰팡이 제거용 세제를 뿌린다. 발광하다가 잠잠해진 벌레가 죽은 줄 알고 치우려는데 벌레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그녀를 응시한다. 놀란 그녀는 넘어지다가 선반 위의 결혼반지를 건드리고 결혼반지는 창문을 통해 절벽 밑 재개발 구역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반지를 찾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그 구역에 침투한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반지를 찾던 중 얼마 전 굴착기에 잘려버린 커다란 나무(그 구역의 정령신같은...)를 발견한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 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전등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충격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벌레들이 행로를 바꿔 일제히 내게 몰려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집에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상하게 다리가 꿈쩍하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양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사타구니에서 오줌처럼 뜨듯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가 터진 거였다.


- 김애란의 <벌레들> 중에서-


그녀는 벌레의 원흉과 '직면'한다. 여기서 '직면'이란 단어에 포커스를 둘 필요가 있다. 그녀는 여느 사람들처럼 자본주의 원근법에 갇혀있었고, 모든 시선이 욕망의 상승점에 고정되어 있어 반드시 봐야 할 아래 지점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자연과 생명,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이 있다. 내가 운영하는 미학모임에서 한 여성 회원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린 이제 '선과 악'을 제대로 규명해야 합니다. 권력의 논리로서가 아닌...
제가 생각하는 악이란 회피하는 것이고 선이란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에 집착하고, 개인 이기주의에 집착하는 우리 모두는 악인 일지 모른다. 그 이면에는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자연과 생명과 타인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벗어나서는 우린 절대 삶을 지속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 <벌레들>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문명의 이기심이 파괴하고 도망쳤던 대자연의 반격 그리고 다시금 발란스를 맞추기 위한 원령공주의 노력. 그 작품의 주제는 '생태주의'를 말한다. 여기서 생태란 단순히 자연뿐만 아닌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물론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생태주의'의 본질은 모든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문명'이 벌레처럼 보고 회피하는 '자연'은 원시적 생명력의 근원이다. 개인의 편리와 쾌락에 대한 만족을 추구하는, 문명 이기주의의 최종 목적지는 사실 '죽음'이다. 지구는 그렇게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생태주의' 속에는 '가난'과 '그 안에 속해있는 사람들'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나도 그들의 일부이고 그들도 나의 일부이기에 우린 절대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을 품은 엄마처럼, 포용하고 함께 살아갈 때 내 삶의 적절한 발란스가 유지된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원근법'에서 탈출하는 방법이요, 우리가 노예에서 해방되는 대안이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최후에 벌레들과 하나가 되고 그 와중에 콘크리트 조각을 붙잡는 것처럼...


"살려주세요"

멀리 가림막 너머로 자동차 소음이 들려왔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퍼뜨린 질 나쁜 소문처럼 A구역을 한 바퀴 휘감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단지 장막 한 장이 드리워졌을 뿐이데, 그 소리가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아랫도리에서 칼로 에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나는 힘주어 콘크리트 조각을 쥐었다.

- 김애란의 <벌레들> 중에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봄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