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토요일 낮, 줄리앙은 이미 학원에 도착해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하철 역에서 만나서 같이 걸어 올라가는거였는데 희선이 메세지를 보내서 그냥 학원에서 보자고 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그는 일층의 카페에서 시간도 때울 겸, 희선도 기다릴 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은색의 아우디 자동차가 길 앞에 멈추는 걸 보았고, 희선이 차에서 내리는 걸 보았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면서 희선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이는 틀림없는 새벽별이었다. 줄리앙은 마음을 바꿔 희선이 먼저 올라간 후 5분정도 더 기다렸다가 학원으로 올라갔다.
희선은 표정이 어두웠다. 수업을 받는 내내 그녀는 무슨 고민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줄리앙은 내내 그녀의 얼굴빛이 신경이 쓰여서 수업 내용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새벽별과 같이 차를 타고 온 것이 신경이 쓰여서 무슨 일이냐고 선뜻 물어봐지지도 않았다. 그저 둘 다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시키는 동작을 할 뿐이었다. 오늘의 수업 내용은 남자가 발을 빨리 바꿔서 서로의 발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걷는 동작이었는데, 발을 교차시킨 다음에는 여자의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결정을 해야 했다.
"남자와 여자가 홀딩을 하고 나면 남자의 오른쪽이 닫힌 쪽이예요. 그리고 정면의 포지션도 살짝 서로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상태가 되지요. 그래서 여자의 오른쪽으로 나가는 아웃사이드 워킹은 편하게 할 수 있는 반면, 여자의 왼쪽으로 들어가는 인사이드 워킹은 공간이 훨씬 좁게 되지요. 그래서 남자가 왼발 왼발로 발을 바꿀 때 미리 인사이드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남자의 진행방향이 여자 발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사선 라인이 되면서 부딪히지 않고 걸을 수 있어요."
"이 때 중요한 건 머뭇거리지 않고 걸어야 한다는 거예요. 남자가 쭈뼛거리게 되면 여자가 자연스럽게 뒤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남자의 공간이 더 없어져 버리게 되겠죠? 불안해도 자신있게 걸어주세요. 여자분들은 남자가 내 왼쪽 오른쪽으로 걷는 동안 남자의 상체를 계속 주시해야 해요."
파블로와 로살리나, 두 선생님이 차례로 동작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지만, 정신이 딴 데 있었던 줄리앙은 자꾸만 희선의 발을 밟았다.
두 사람은 다시 카페에 앉았다. 희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사실은 미영이랑 새벽별 쌉이랑 얘기를 했는데요, 우리 여기 학원 다니는거에 대해서요... 빠라도스 운영진들이 알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거라고... 우리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구요. 빨리 한 쪽을 결정해서 한 단체에 소속되는게 좋을거라고 하더라구요."
희선은 미영의 메세지 내용도 줄리앙에게 전해 주었다. 희선은 약간 억울한 표정이었다. 줄리앙은 이런 새벽별과 미영의 반응을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동호회 입장에서는 회원을 유지하는게 중요하니까요. 함부로 회원들이 여기저기 빠져 나가고 들락날락 하면 동호회 유지가 힘들어 지겠지요. 회원들 같의 유대감도 형성하기 힘들어 질거구요. 전 충분히 두분의 의견을 이해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전문 학원에서 배운다는 게 프로 댄서가 되겠다거나 다른 데 양다리 걸치겠다거나 그런건 아니잖아요. 그저 더 알고 싶고 더 잘 추고 싶은 것 뿐인데요."
희선이 반발했다. 줄리앙이 자신의 의견과 다른 입장을 보이는게 실망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줄리앙은 그녀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동감이예요. 잘 추게 된다고 다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어울리지 못 할 거라는 건 저도 기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호회 회원들 입장에서는 이질감을 느낄 수는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동호회라는건 결국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거니까요."
희선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쩌면 좋을까요? 줄리앙님은 어떻게 할 거예요?"
줄리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런 반발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입장이 이해는 됐지만, 그렇다고 배우겠다는 사람의 의지를 꺾는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동호회에서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동호회를 그만둘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의 그녀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가는 더 우울해 할지도 모른다.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줄리앙은 일단은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그녀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말로 그 사람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저 몸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춤을 잘 추게 되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동호회 활동도 더 잘 할 수 있다는 걸요."
"그럼 줄리앙님은 학원에 계속 다닐거예요?"
"네, 전 학원이랑 동호회랑 둘 다 열심히 해 보려구요. 할 수 있는데까진 해 봐야죠."
희선은 그제서야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줄리앙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던건데, 희선님은 왜 닉네임 안 만들었어요? 아니면 희선이 닉네임이예요?"
"아... 아뇨. 그냥 제 이름이예요. 닉네임... 그거 꼭 필요한가요?"
"아니, 그런건 아닌데, 그래도 이름에다가 님자를 붙이면 좀 어색하잖아요. 사실 희선씨 이래야 자연스러운데 희선님 이러니까 어색하지 않나요? 하하..."
"그런가요? 사실은 닉네임을 만들어야 하는걸 모르고 동호회에 들어갔어요. 갑자기 정하라고 하니까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어찌하다 보니 닉네임 없이 삼개월째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고민이 되어서 못정하겠어요."
희선이 쑥스럽게 웃었다. 줄리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지어드릴까요?"
"어, 정말요? 그게 좋은 생각 같아요. 전 평생 못 지을 것 같거든요."
희선은 의외로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예쁜 이름으로 빨리 생각해 볼께요. 아, 맘에 안 들면 안 써도 돼요."
"어, 혹시 이상한 이름 지어주고 놀리려고 그러는건 아니죠?"
"설마 그럴리가요. 저 못믿는군요?"
줄리앙은 손을 내저었다. 희선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줄리앙님은 몇살이예요? 지금까지 서로 나이도 모르고 지냈네요."
"내년이면 딱 서른 돼요. 이십대도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네요."
줄리앙은 나이를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낼 모레면 서른인데, 지금까지 뭘 한걸까...
"어머, 저보다 한살 많네요? 전 더 어릴 줄 알았는데... 제가 누나일 줄 알았거든요."
"그래요? 전 희선님이 훨씬 어린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나이가 많았군요. 화장을 안해서 그런가..."
한 살 아래면 호랑이띠네. 줄리앙은 수줍음 많은 호랑이를 상상했다. 귀여웠다.
"그래서 실망했나봐요? 제가 나이가 생각보다 많아서..?"
희선이 뾰루퉁한 얼굴로 투덜댔다. 앗, 내가 말실수를 했나? 줄리앙은 펄쩍 뛰면서 희선의 기분을 풀려고 애썼다.
"아! 그게 아니구요, 동안이라는 얘기예요. 어려보인다구요..."
"장난이었어요. 아하하... 그런데 저보다 나이 많은데 그냥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줄리앙은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오빠 하고 다정하게 부르면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아직은 이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아뇨, 그냥 이대로가 좋은데요. 전 말 쉽게 잘 못 놓는 스타일이라서요. 천천히 더 편해지면 놓을께요. 괜찮죠?"
희선은 그의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우리 사이가 아직은 편한 친구사이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긴 서로 알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희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때 메세지가 온 모양이다. 폰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줄리앙은 커피를 더 마시고 싶다는 핑계로 카페에 남았다.
"그럼 다음주 땅고 빠라도스 중급 수업에서 봐요."
명랑하게 인사를 남기고 종종 걸음으로 카페 밖으로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줄리앙은 우유부단한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서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었다.
줄리앙은 커피 한잔을 더 시켰다. 오늘 벌써 이 카페에서만 세 잔째다.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코발트색의 물감을 칠한 듯 창밖은 온통 짙은 푸른색이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 밝아지면서 푸른빛은 검은 색으로 가라앉아 간다. 부쩍 낮이 짧아진 걸 느끼는 요즘이다. 가을이 깊어진 탓이겠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로스팅을 진하게 하는 이 카페의 특징 때문인지, 아니면 세번째 잔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커피가 쓰게 느껴졌다. 줄리앙은 평소에 안 넣는 설탕을 두 스푼이나 넣었다. 이제는 어색한 단 맛 사이로 쓴 맛이 더 강조되어 입안을 맴돈다. 줄리앙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카페 주인이 다가와서 테이블 위에 불이 켜진 양초를 놓고 간다. 어둑했던 테이블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촛불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줄리앙은 메세지를 받고 표정이 확 밝아진 희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를 그렇게 환하게 미소짓게 만든 사람이 새벽별인지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희선은 지난주에 그랬듯이 메세지를 받고 나서 서둘러 일어섰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난주는 굳어진 얼굴이었고 오늘은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줄리앙은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남자가 머뭇거리면 여자는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남자의 공간이 더 없어져 버려요."
갑자기 수업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줄리앙은 그 설명이 자기를 꼭 집어서 하는 말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른다면 어떻게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지? 자동으로 춤을 추는 계획이 짜여진 프로그램이 머리속에서 척척 돌아가서 다음 동작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여자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길이 자동으로 안내되는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그냥 따라만 갈 수 있다면 머뭇거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나는 이제보니 참 한심한 녀석이었구나..."
줄리앙은 스스로에게 벌이라도 내리듯이 남은 커피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배경음악 : Mi Dolor (아픔)
어제의 먼 여정에서 돌아와 내 아픔을 잊으려 하네
고통받은 영혼을 위로하며 난 믿고싶네, 사랑의 속임수와 약속들을...
한때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을거라 믿었던 행운의 잔인함과 비통함을 짊어진
이 고통을 잊는 가장 쉬운길은 망각에 빠지는 것...
나는 당신의 마음의 노예였네
난 당신의 변덕에 놀아났고 당신은 배신으로 보답했지.
오늘, 상처받은 내 영혼을 치유하며
다시는 당신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으리.
왜냐하면 나는 지난일들을 다 잊어버렸으니까.
사랑에 취하던 즐거움들과 아픔이 치유되던 기쁨을.
나의 열정은 사랑을 위한 감각만 주지만
나의 영혼은 그 순수함을 유지하고
빨리 그 슬픔을 잊어버리게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