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나는 빗속을 피해 달려가고 있다

6월 공통주제 <연애> ㅣ 김연정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5-11 오후 1.52.32.png 디자이너


즐거운 감정은 빨래가 마르듯 금방 날아가 버리고, 우울한 감성, 생각들은 언제나 침전하여 남아있음을 느낍니다. 우울함, 불안함, 슬픔, 좌절감에 예민하고 행복에 예민하지 못한 제 자신이 조금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지만, 아직까지는 수면 위 햇살보다는 우울한 바다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어두운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 심해心海 속을 당분간 탐구하면서 글을 써 볼 예정입니다. 언젠가는, 나를 힘없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게로 자리를 옮겨가길 기대합니다.



그레이 오렌지 ㅣ 출판 디자이너

시각디자인 전공. 필살기는 출판 관련 디자인. 사진찍기와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함




얼마 전에 친구들이 몇 모인 자리에서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길 가다 보면 커플이 그렇게 많더라. 다들 연애 중이야. 그런데 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놀랍게도 전부 피하는 사람이지. 나에게는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아.”

그 말에 가슴이 쓰렸다. 사실 예전에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애란, 그중에서도 서로가 비슷하게 사랑을 하는 연애를 한다는 것은 전율할만한 행복감을 주는 것일 텐데, 그렇게 값어치 있는 것이 남들에게는 너무나 누리기 쉬워 보이는 반면, 나에게는 정말로 각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연애를 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았다.

한때, 사랑하는 연인이 바라는 이상형에 가까워지기 위해, 원래 나의 모습을 많이 바꾸려던 시기가 있었다. 거친 단어 선택 - ‘젠장’, ‘제기랄’ 정도인데도 - 은 그 사람에게 깨는 요소라 탈락, 좋아했던 빈티지한 원피스도 성적 매력이 떨어져서 탈락, 숏컷은 별로, 긴 머리는 오케이.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은 손은 조금 아쉬움. 하트나 리본 모양의 반짝이는 크리스털 주얼리는 여성스러움을 부각시켜주는 아이템이니 착장하면 플러스. 무뚝뚝한 말투는 더 부드럽고 애교 있게. 전화받을 때는 최대한 반가운 마음이 들도록 하이톤 목소리로 반겨주기. 이 모든 것을 그가 나에게 억지로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익혀온, 그에게 마음을 얻으려면 해야만 했던 리스트였다.

지금 내가 그를 만났다면, 아마 몇 번 만나지 않고 헤어졌을 것이다. 나의 원래 말투나 취향, 관심사 등이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각자가 가진 취향이나 가치관이 상대방과 전혀 다른 것은 연애에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의 것에 전혀 매력을 느낄 수 없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내면에 반하지 않고 외적 분위기와 매력에만 도취되어 열정이 이어지는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단 한 번에도 부서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를 때였고, 흔히들 떠올릴 수 있는 이상적인 여자 친구의 틀에 내 모습을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자체를 스스로 훈훈하게 여겼을 적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놀랍게도 비슷한 이상형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의 모습을 바꾸려는 시도가 내가 여성으로써 더 나아지기 위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억지로 나를 다른 사람처럼 보이도록 바꾸려는 노력은 상당히 버거웠다. 내가 평소에 하고 다니지 않으니, 차고 다니라며 사준 목걸이는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닌데도 아까울 정도로 취향이 아니었고, 낮은 톤의 목소리가 부리는 억지 애교는 부자연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보다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상대방에 대해 점점 더 잘 알게 되었고, 상대방은 그러지 못 했다. 내 의지가 아닌 강제 이별을 한 후에 내게 남은 것은 상대방에 대한 공허함과 지고지순한 일방적 사랑에 희생되어버린 원래 내 모습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불행히도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수 없기에 누구든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도 사랑을 느끼고는 한다. 너무도 다른 사람이 서로의 영역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료되기 시작하여 각자의 영역을 이런저런 모양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면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채 자신이 갖고 있는 틀에 상대방을 넣어야만 한다면, 그 관계가 끝나버리는 순간 어찌할 수 없는 중력에 이끌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거리일 것이다.

누군가는 발랄한 하이톤의 목소리 대신 나의 나긋한 저음의 목소리에 매료될 것이다. 누군가는 여성스럽고 통통 튀는 말투 대신 털털한 단어 선택을 곧잘 하는 나에게 끌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 그리고 음악을 공유하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처음에 언급했던 친구처럼, 내리는 빗방울을 놀랍게도 피하면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끔 빗방울을 맞으려 애를 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믿는다. 나처럼 반대편에서 어느 누군가가 빗속을 피하면서 오고 있을 것임을.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때라는 것은 없다. 각자의 속도가 있음을 우리는 ‘삶’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얘기한다. 그러나 연애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연애 역시 삶이다. 각자의 속도가 있고 사람의 생김새처럼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지구 상에서 단 한 번의 중복도 허용되지 않는,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만들어 가는 독창적인 관계이다. 연애는 그렇게 특별한 확률을 지닌, 누구와의 것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연애를 특별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것의 속도가 느려도, 희미한 듯 보여도 응원하고 아껴주며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먼저 내 가치관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 보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다 더 섬세하고 깊게 알고 그것을 누리고 있다 보면, 즉 내가 그리던 이상향의 모습으로 나를 가꾸어 가다 보면, 어느 날 누군가가 나타나 우리는 참 비슷하다고 말을 건네올지도 모르겠다.

빗속을 피하면서 걷는 길을 고집하더라도,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도, 그 누군가는 끝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나와 닮은, 또 서로의 내면에도 끌리는 누군가를 결국 만나게 된다면, 세상에 다시없을 멋진 연애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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