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공통주제 <일상> ㅣ 곽정빈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여행을 시작하고 10개월 째, 나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한인 민박에 머물고 있었다.
같은 숙소에서 묵고 있던 한 여자분이 내게 물었다.
“여행이 일상이 된 삶은 어떤가요?”
대개 사람들의 질문 속에는 그 사람이 듣고자 하는 대답이 이미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여행이라는 화제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들의 눈에 비칠 내 모습을 상상한다.
턱 밑까지 자라난 머리를 묶어 올린 헤어스타일과 거친 수염, 세계 각국의 뜨거운 태양을 받아냈음을 생생히 증명하는 구리빛 피부와 언뜻언뜻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 보이는 팔 안쪽의 타투.
가령, 나를 좀 더 잘 아는 일행이 누구나 아는 대기업을 퇴사하고 시작한 세계여행이라는 배경을 흘려준다면 이미 그들 앞에선 나는 아무도 감히 상상 못할 결단을 내린 쿨가이이고 세상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보헤미안이 되어버린다.
간혹 돌아가서의 삶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죠뭐” 라는 식의 대답은 그런 내 모습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들에게는 굳이 애써서 내 여행의 면면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만날 일이 없는 관계라면 더욱 말이다. 그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영웅의 서사시를 듣고 싶은 것일 뿐이니까. 그리고 스쳐가는 많은 인연에 지친 나로써도 그 편이 훨씬 편한 일이었다. 일종의 감투가 필요했다 랄까.
물론 당시에 내가 그 여자분에게 어떤 답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이때까지와는 달랐던 긴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 분은 나처럼 긴 여행을 막 시작한 사람이었다는 점, 그 질문의 톤과 분위기에는 사뭇 가볍게 대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는 점, 눈에 어리는 빛은 결코 동경이 아닌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지금 와서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여행이 일상이 된 내 삶은 어땠는가라고.
우선 내게 여행은 일상이 아니었다. 난 단 한 번도 이 여행이 일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속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여행은 일탈이자 도피였다. 이 여행은 결국에 끝날 여행이었고 나는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시작하고 오래지 않아 나는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임을 알았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행 초기에는 내 앞에 펼쳐질 무수한 삶의 양태들을 맞이할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물론 서두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많은 것을 보기보다는 한 곳에서 오래도록 깊이 느끼려고 노력했고 걷기보다 앉아있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어디를 갈 것인지 고민하고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적응 하는 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의 연속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여행이 내 생애 다시 오지 못할 여행이라는 강박관념은 그런 나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더욱이 나는 내 삶의 큰 부분을 포기한 만큼 응당 그에 걸맞을 ‘무엇’인가를 얻어야 한다는 보상심리는 그 촉매제였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일지라도 소화능력 이상의 영양분은 독이 된다는 것을, 자극도 한 두 번이어야지 그 것이 계속되면 고통이라는 것을 나는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어코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40일 동안 여행 중 가장 ‘일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다소 외곽에 떨어져 조용한 구역에 나만의 독방이 있는 비앤비를 숙소로 잡았다. 스페인어 학원을 등록했고 학원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그 날 배운 것을 복습했다. 매일같이 가는 구멍가게에서 장을 봤고 같은 시각에 밥을 해먹었다. 저녁에는 몬주익 분수대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형형색색으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분수를 오래도록 지켜봤다.예측 가능한 삶은 내게 비로소 안정감을 주었다.
예측 가능한 반복성, 안정감, 편안함. 하지만 필연적으로 따르는 무료함, 따분함, 권태감. 그 양날의 검과 같은 시간들을 나는 관망하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윽고 나는 알게 되었다. 많은 곳을 빠르게 보아왔던 시간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 감각의 날이 더욱 날카로워 진다는 것을 말이다.
가령 누군가 스페인에서 가볼 수 있는 많은 곳을 포기하고 바르셀로나에만 지낸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나는 대답할 것이다. 몬주익 분수를 본 사람은 많지만, 비오는 날의 분수와 맑은 날의 분수가 어떻게 다른지,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분수의 색이 어떤 패턴으로 변하는지, 어떤 요일에 수많은 인파를 피할 수 있는지, 분수대 계단에서 맥주를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바르셀로나에서 해질녘이 가장 아름다운곳은 티비다보 언덕이 아니라 이름 없는 동산이라는 것을, 바르셀로나의 예술성은 가우디의 현란한 건축물에서가 아니라 쓰러져가는 골목 뒤편 펍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10시가 되어도 떨어지지 않는 햇살만이 아니라 그만큼 짧아진 밤을 밀도 있게 즐기는 히피들의 문화가 있는 곳이 바르셀로나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만큼 많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여행 중간중간에 일상의 에너지를 충전할 거점을 만들었다. 탄자니아 다르에르살람에서 3주, 영국 런던에서 2주, 쿠바 하바나에서 한 달, 페루 리마에서 2주가 그 곳이었다. 반면 페루를 시작으로 남미대륙을 도는 3달 동안은 한 곳에서 5일 이상을 지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다녔다. 20시간 이상의 야간버스를 타고 하루에 수백 Km씩을 이동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광활한 남미 대륙에서 잠에 취한 채 또 와인에 취한 채, 빙하와 사막과 화산과 폭포를 쉼 없이 오가며 이른바 자연경관의 극치인 남미대륙을 온 몸으로 느낀 그 3개월 간의 기억은 그래서 더욱 몽환적이었고 꿈결 같았고 아직까지도 아련하다.
이제 다시금 ‘여행이 일상이 된 삶’에대하여 대답해 본다.
나는 여행이 일상이 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설령 내게 잔재주가 많아 경제적인 수익을 창출해가며 지속 가능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평생 그런 삶을 살고싶지도 않다. 여행이 삶이 되어버린 삶이라면 여행은 더 이상 여행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이 가쁘면 앉아 쉬어야 하고, 달리고 싶으면 심장이 터질때까지 달리는 것. 그 단순함이 일상이 아닌 삶을 즐기는 방법임을 잘 안다. 나는 내가 예측 가능한 내 삶의 범위 내에서 일상을 꾸리되 끊임없이 일상이 아닌 것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리는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