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에 관한 짧은 이야기 ㅣ 한수영
나를 지탱해줄 힘은 오로지 글쓰기가 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는데...급 슬퍼지는 건 왜일까요?
작가 프로필 ㅣ 한수영
키워드: 아빠,할아버지,책,글쓰기,여행
귤에게 보내는 편지.
귤. 까도 까도 그 향에 취해 계속 까고 싶은 너. 알맹이만 남은 모습은 어찌나 탐스러운지. 너의 그 주홍빛 자태에 이끌려 나는 자꾸만 입 속으로 너를 꿀꺽한다. '음, 알알이 퍼지는 싱그러운 맛. 새콤달콤 혀 끝을 자극하는 맛깔스런 맛,' 너는 여전히 기나긴 겨울을 함께 하기 좋은 동반자다.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땐 난 널 부르지도 부를 수도 없었어. 그저 아빠나 엄마가 내 보행기 앞에서 너를 들고, "우리 공주님 귤 줄까요?" 하고 물으면 "어서줘요." 대신 두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매우 흥분했었지. 그건 마치 3일 굶은 원숭이가 바나나를 보고 발작하는 것과 같았어. 그 모습에 아빠는 느릿느릿 너의 껍질을 깠지. 너의 체취가 바람을 따라 솔솔 내 코끝에 어리자, 나는 입맛을 다시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꾸만 아빠 앞으로 보행기를 밀었어. 왜? 너의 그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맡고 싶어서. 이런 내 맘 너는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슬슬짜증이 나기 시작했지. 그럼, 아빠가 반으로 너를 갈라 한쪽을 떼어 내 입에 쏙 넣어줬어. '오 마이 갓' 긴 기다림 끝에 얻은 꿀맛 같은 너. 나는 또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아빠 입으로 향하는 너에게 손을 뻗었지. 이런, 제기랄! 팔이짧아 아빠 입 속으로 들어가는 너를 잡을 수 없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빤 얄밉게도 어찌나 크게 웃던지. 그러다 뒤로 넘어져 너와 나 사이는 더욱 멀어지고 말았어. 난 움직일 수 없었어. 보행기에 갇힌 슬픈 아가였거든. 나는 바닥에 뒹구는 너를 보면서 입술을 앙 다물었지. 그 절망감이란... 결국, 하염없이 멀어져 가는 너를 보며 난 입을 삐죽거리다 울음보를 터뜨렸지. 그래야 네가 내 입 속으로 또 들어올 테니깐. 하하하. 내가 너무 영악했나? 원래 인생은 그런 거야.
내가 제법 커서 너를 드디어 귤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쯤엔, 매일 너의 껍질을 손톱 밑이 노래지도록 까는 게 취미였어. 먹지도 않으면서...그냥 깔 때마다 상큼하게 튀는 네 향기가 좋았나봐.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엄마는 내 등짝을 때리며 "그만 까. 먹지도 않으면서 귤을 왜 죄다 까놔." 윽박질렀어.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몰래몰래 너를 까놨지. 그럼, 넌 아침 상에 쨈이 되어 나와 재회했어. 지금도 엄만 네 철이 오면 너로 쨈을 만들어줘. 구워진 빵에 너를 살짝 발라 먹는 맛이란. 아~벌써 침이 고인다.
난 그래. 항상 너를 떠올리면 파블로프의 반사 실험의 개처럼 침이 고여. 그럼 나의 뇌는 각종 나를 치료하는 좋은 호르몬을 생성하지. 넌 나에게 그런 존재야.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무엇이 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근데, 넌 그걸 또 해낸 대단한 귤이지. 아마 네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그런 치유의 힘이 생겼을 거야. 귤아, 이름도 아름다운 귤아. 너와 함께한 지난 3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사실 웃자고 쓴 편지인데, 지금 나는 너한테 또 한 번 감동했어. 작은 네가 나에게 준 기쁨과 행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어.
이제 너한테 보내는 러브레터도 끝이 보인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이 편지를 보고 네가 혹시라도 나에게 답장을 보내준다면, 나는 어린 왕자가 산다는 별로 우주여행을 하는 거처럼 기쁠 거야.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 엄연히 너와 나는 다른 종자이니깐. 그래도 나는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사랑해, 귤아."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서도 지금처럼만 날 행복하게 해주면 고맙겠어. 너만은 사라지지마. 요즘 북극곰이 사라질까 나는 무척이나 두렵거든. 그러니 너는 이 지구에서 사라지지마.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너무 이기적인가? 귤아, 난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어. 그래도 너한테 이런 고귀한 편지를 보내는 인간은 내가 처음이지? 그럼 됐어. 모든지 처음은 아름다운 거야.
귤을 사랑하는 어느 30대 여자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