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홍선배

ONE DAY ONE PAGE ㅣ 이정민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03 오후 2.30.52.png 대구아가씨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나는 키가 크다. 167 정도 ? 처음 만나거나 만난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키가 꽤 크네, 키가 얼마야 ?'라고 물어봐 답하면 다들 '오, 그렇구나 키가 크네' 라고 말한다. 큰 편이지만 유별나게 큰 것은 아니라서 키 때문에 특별히 좋을 것도, 불편할 것도 없다. 그래도 좋은 점을 따져보자면 대학생 때 학원에서 일하면서 작은 키의 여자선생님이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은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할 때는 몰랐는데 작고 여리여리한 후배의 교생실습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깨달았었다.
일하는 학원에 처음 보는 초등학생이 있었다. 원장선생님께 '(학생이) 새로 온 거에요 ?'라고 여쭤보니 '새로 온 사회선생님'이라고 했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어려보이는 남자선생님이었다. 그 분이 선생님이란 걸 알고 나서부터, 나는 왠지 그 분이 키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실 것 같아 함께 서있기가 민망하고 내 키가 미안했었다.
퇴근길에 이야기를 하다보니 철학과에 다니고 있었고, 책모임이 풍성해질 것 같아 선배를 초대했다. 자주 만나다보니 친해졌고 선배한테 '운명애'가 뭔지 이해가 안간다고 물어봤었다.

"내가 키가 작아. 키가 작아서 남중남고에서 친구들이랑 어울리기 힘들었어. 책을 읽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지. 그래서 철학과를 들어갔고 지금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내가 키가 작지 않았으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진부한 사랑고백 같지만, 작은 키가 선배의 제 1단점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선배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단정짓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 1단점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선배에게 꽤, 감동을 받았었다. 깜짝 놀랐던 것 같기도 하다. 겉으로는 시치미 떼며 '그건 현재 상황이 좋기 때문에 지금 와서 좋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정신승리법 같은 걸.'이라고 말했지만.
어제 아큐정전을 읽었다. 여태 아큐정전을 읽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처음이었다. 책에서 아큐가 하는 정신승리법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운명애와 반대지점에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이해하는 운명애는 나의 현재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 내가 지금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사과껍질 깎기도, 귤껍데기 벗기기도 귀찮지만, 사과껍질 없이 사과가 자랄수도, 귤껍데기 없이 귤알맹이만 자랄 수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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