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ONE PAGE <술> ㅣ 한공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송중기처럼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읍내에 갔다오는 동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할머니는 마당에 널어 놓은 고추가 걱정되어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역시나 와보니 할아버지는 평상에서 술을 마시며 비에 젖고있는 고추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직업이 뭐였나요? 아버지께 처음 물어봤을 때 아버지는 입에 뭔가를 씹고있는 듯, 우물거리셨다. 농사꾼이라 하고싶었지만 할아버지가 농사를 직접 지은 것은 아니었단다. 매를 기르고 꿩사냥을 하고 매일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셨던 분.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중학교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엄청 고생을 하며 자수성가를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할아버지의 기억을 물었다. 아버지에게 술시중 시켜서 아버지가 무거운 술주전자를 들고 양조장을 왔다갔다 하신 이야기. 아버지가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소풍을 갈 때 할아버지가 아버지 물병에다가 막걸리를 담아주신 이야기. 즉 아버지는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는 아니지만 신입사원 시절 회식자리에서 술을 엄청 마시고 집에 가다가 전봇대를 정면으로 받아 이빨이 와장창 날아간 전적이 있으니 술로 고생 좀 하신 것은 맞다. 그럼 나는?
술을 좋아한다. 준 알콜중독자라고 할까? 가끔 집에서 혼자 마신다. 제일 좋아하는 술자리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먹는 것이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술자리를 일체 갖지 않는다. (그 자리는 정말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우니까)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술자리가 언제였는가 떠올려보니…20대때 부산 해운대에서 친구들과 해뜰 때까지 마셨던 술자리도 있고, 30대때 홍콩여행을 갔다가 술집이 문을 다 닫아 남의 결혼 피로연 파티에 몰래 들어가 마셨던 술도 기억난다. 뭐니뭐니 해도 단연코 1위는 대학 때 전통무용과 공연 뒤풀이에 따라갔던 술자리. 나는 내 맞은편 무용과 여학생이 너무 이뻐서 (공연보는 내내 그녀만 봤음) 할말을 잃고 혼자 술을 마시며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그녀는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손으로 연기를 휘저으며 “담배 좀그만 피워요.” 투덜댔다. 그래서 나는 “네? 그럼 할게 없는데…” 했다. 그녀는 “저랑 얘기를 해요.” 라고 했다. 그 순간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우린 3개월 뒤에 사귀게 되었고 3년간 캠퍼스 커플로 지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진 날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술을 마셨다. 아! 내 인생의 혼술이 그날 시작되었구나…생각하니 그것도 참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와 나의 시작과 끝에 술이 있었다. 왜 인간은 이리도 술과 분리될 수 없을까? 인간의 연약함 때문일까? 술이 가진, 인간과의 공존의 운명 때문일까?
한때 술을 끊은 적이 있다. 언제나 취해있는 자신이 너무 싫어서 큰맘 먹고 술을 멀리했다. 알콜은 담배보다 중독성이 강하지 않다. 없으면 그냥 안 먹게 된다. 가끔 비가 몹시도 오는 날 창밖을 보며 '아 이런 날은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시며 떨어지는 비를 구경해야 제맛인데...'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 문득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비오는 날 혼자 술을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마당이 젖고 나도 젖고 온 세상이 젖는구나...'그런 생각을 했으려나? 술이 가장 먹고싶은 날은 외로운 날이다. 술이 필요하다기보다 같이 술 마실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게 혼술은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보류이다.
술잔은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담는다. 그래서 어떤 술을 먹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 어떤 마음, 어떤 사람과 함께 먹느냐이다.
알콜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다. 유전이기도 하고 인연의 도구이기도 하며 인류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도 와인을 좋아했다고 하니…술은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축제의 신이자 술의 신...바커스는 이성을 상징하는 아폴론의 정 반대편에서 감성의 대표주자이다. 인간은 결국 이성과 감성 사이의 길을 방황하는 것 아닐까? 맨정신과 취함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아닐까? 그 방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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