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커피, 겨울밤, 그리고 식빵

ONE DAY ONE PAGE ㅣ 최미애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1-25 오후 2.18.58.png 직장인 명상가
명상을 하면서 '관찰'이 취미가 되었어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촉감을 느끼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파악하는 관찰 작업을 수행하고,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순간 순간 깨달을 수 있도록 뭔가를 좀 써봐야 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작가 프로필 ㅣ 최미애

IT 9년차 직장인.

불교와 명상에 관심이 많아 경전을 읽으며 '집중'과 '관찰' 수행을 하고있다.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세상에 관한 '관찰일기'를 쓰려한다.




스타벅스에 가면 거의 카페 라떼를 시킨다. 오늘 시킨 라떼 위에 얹혀져 있는 우유 거품이, 지금 막 쌓여서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눈밭 같다. 거품 아래에는 진한 맛의 커피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우유 거품을 되는대로 마셔 보아도 커피 본연의 색은 쉽사리 나타나 주지 않는다. 간신히 눈밭을 헤치고 나면, 기분 좋게 빛바랜 베이지 색 표면이 등장할 것이다. 내 커피잔과 마주하고 있는 다른 커피잔 안으로 시선을 옮기면, 거기에는 '오늘의 커피' 가 담겨 있다. 내 커피와는 다르게 검은색에 가까운, 그러면서 제법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다. 그의 커피는 내가 글씨 쓰는 진동을 테이블로부터 전달받아 잔잔한 물결을 만든다. 커피의 검은 색을 만들어 내는 분자 보다 물 분자가 훨씬 많기 때문에 이렇게 투명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투과할 만한 투명한 물질이 없는 우주는 어째서 그렇게 검고 깊고 또 투명할 수 있는 것인지.


겨울밤 하늘은 시린 만큼 더 맑게 느껴진다. 이렇게 미세 먼지가 일도록 지구 위의 사람들이 부산을 떨어도, 겨울밤 하늘에서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은 쉽게 눈에 띈다. 오리온자리를 이루는 모든 별이 보이지는 않아도, 오리온의 허리띠를 구성하는 세 개의 별과 이를 둘러싼 네 개의 별들은 다른 별자리와 착각하기 어렵다. 이런 시절의 이런 서울 하늘에서 이름을 아는 별자리가 아직도 보인다는 것은 - 고대, 아니 하다못해 근대까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 감탄할 만한 일이다. 볼 수가 없는 탓에 저 숱하게 많은 별의 이름은 대부분 잊혀도, 인간이라는 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대로 남을 별들. 거대한 별들의 긴 일생에 비하면 사람의 역사라는 것은, 그것도 숱하게 살아 있고 살아왔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라는 단 한 개체의 역사라는 것은, 어쩌다 이렇게 짧고 희미한가. 그런데도 이런 나의 삶은 또 어찌 이렇게 나라는 한 개체의 의식 속에서는 무한하기만 한가.


이런 모순적인 '삶'이라는 한 덩어리의 시공간이 내게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 삶을 얼마나 오랫동안 뜯어 먹고 살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태 서른 세 해는 넉넉히 먹여 살렸다. 아마도 이 식빵 덩어리를 닮은 내 삶에는 내가 좋아하는 밤이나 건포도, 호두 같은 것은 아주 드물게 들어 있는 모양이다. 토핑으로 아몬드 슬라이스라도 얹어져 있으면 좋겠지만, 내 인생이나 타인의 인생이나 대부분 담백한 우유 식빵일 것이다.


한동안 검은 커피가 일으키는 잔물결을 바라보다가, 나라는 식빵 한 조각을 뜯어내어 마주 앉은 이의 '오늘의 커피'에 조금 담갔다가 먹어 본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목 넘김도 수월하고, 맛도 제법 어울리는 것 같다. 마주 앉은 이에게도 그이의 빵을 조금 쪼개어 내 라떼에 찍어 먹어 보라고 권한다. 오늘 내린 눈 같은 우유 거품을 묻혀 먹어 보면, 그의 식빵도 꽤나 고소하게 느껴지리라. 누군가와 맛있는 삶을 나누어 먹는 순간이다. 별의 일생만큼 길지 않아도 제법, 반짝인다.


스크린샷 2017-02-10 오후 8.02.46.png


최미애님의 다른 글을 읽고싶다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목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