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된다

KEYWORD ONE PAGE <얼음> ㅣ 곽정빈

by 한공기
KakaoTalk_20160508_223016445.jpg 연구원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지난여름은 유독 더웠고 또 길었다. 그래서 나는 사내 탕비실에 있는 커피머신을 그렇게나 찾았던 것 같다. 자연스레 다이얼을 시계방향으로 두 눈금 돌려서 익숙한 농도와 양을 선택하고 버튼을 누르면, 이내 커피머신은 둔탁한 기계소음을 내면서 원두를 갈아내고 진한 향기의 아메리카노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커피머신이 머그컵에 커피를 채우는 동안 나는 냉동실을 열어 얼음 곽을 찾는다. 고맙게도 얼음은 매번 얼음 곽을 가득 채운 채로 꽁꽁 얼어있었다.


커피머신에서 갓 내린 진한 아메리카노 바다로 얼음을 투하한다. 칠흑 같은 심해로 꺼졌던 사각의 얼음들이 하나둘 솟아오르고, 새까만 수면 위를 떠다니며 머그컵과 더불어 경쾌하고 청명한 공명을 만들어 낸다. 수면을 가득 덮으며 일어났던 흑갈의 기포들은 얼음 면의 경계를 만나며 점차로 사그라드는데, 그 소리는 마치 새벽녘 해안을 쓸고 빠져나가는 잔잔한 파도의 그것과도 같게 느껴진다. 그렇게 해변의 실로폰 연주가 서서히 잦아들 때 즈음이면, 기어코 얼음들은 빙하마냥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더위에 지친 나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내가 털어 넣어버려 비어버린 만큼의 칸에 다시 물을 채우는 일이다. 하지만 기다란 직사각형의 얼음 곽 모든 칸에 물을 가득 채우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정수기의 턱은 너무 좁아서 얼음 곽의 모든 칸 위로 수도꼭지를 배려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거롭지만 얼음곽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외곽의 칸에 먼저 물을 채운다. 그다음엔 미처 다 채우지 못한 나머지 중앙의 칸에 또 다른 컵으로 물을 받아서 조금씩 부어 채워준다. 혹시라도 바닥에 물을 흘리기라도 한다면 탕비실 옆 베란다에서 대걸레를 꺼내와 바닥을 닦아줘야 한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딱 맞게 차가워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면서 같이 사는 법을 배운다. 같이 산다는 것은 시원하게 말아 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키지 않음이다. 비어져 있는 것을 인지하고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함이다. 우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눈에 띄는 곳에 적어놓지 않아도 비어져 있는 커피 원두와 비어져 있는 물탱크와 비어져 있는 얼음을 채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얻은 편의는 그 누군가의 배려이고, 나의 배려는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결국엔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써 구태여 설명하는 것이 우습다. 이는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되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상식이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듯이, 가라앉은 것은 건져내야 한다는 것은. 묵혀 두었던 잘못은 꺼내 발겨 정정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뺨을 맞으면 아프듯이 상대의 뺨도 아프다는 것은. 부당하게 얻은 이익은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것은. 사과받아야 할 일은 사과받고, 용서할 일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은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말이 가끔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이 요상한 시절 속에서 당연함을 논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하지만 물을 얼리면 반드시 얼음이 될 것이다. 그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고 나부터 끊임없이 내 주위의 빈 곳을 채워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올겨울 구세군함에 단 한 번이라도 적선한 적이 있었던가? 나의 빈 곳을 채우기에 급급해 내 주변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나? 혹시 나 스스로를 비어버린 얼음 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또 아니었나? 내 주변을 채우는 것은 결국 다시 나의 그릇을 채우는 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되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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