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ONE PAGE <얼음> ㅣ 김연정
즐거운 감정은 빨래가 마르듯 금방 날아가 버리고, 우울한 감성, 생각들은 언제나 침전하여 남아있음을 느낍니다. 우울함, 불안함, 슬픔, 좌절감에 예민하고 행복에 예민하지 못한 제 자신이 조금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지만, 아직까지는 수면 위 햇살보다는 우울한 바다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어두운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 심해心海 속을 당분간 탐구하면서 글을 써 볼 예정입니다. 언젠가는, 나를 힘없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게로 자리를 옮겨가길 기대합니다.
오전 8시경. 여의도역에서 9호선을 타고 당산역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던졌다. 에스컬레이터는 두 줄 서기라는 말이 무색하다. 느긋한 이들은 오른쪽으로,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왼쪽으로 암묵적 규칙을 따라 일렬종대로 자리를 잡는다. 나는 항상 왼쪽에 서는 타입이다.
플랫폼에 도착했다. 곧이어 전동차가 들어온다.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전동차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사람들은 비튼 얼음 틀에서 튕겨져 나오는 얼음들처럼 나왔다가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아침마다 타인과 불편한 접촉을 해야 하는 이들의 얼굴은 굳어질 뿐, 굳이 언성을 내지는 않는다. 대신 각자 귀에 꼽은 이어폰 속 그네들의 취향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주입받는 것으로 삭히는 듯하다.
문이 닫히고 전동차가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 조용한 영역싸움은 계속된다. 엉덩이를 찌르는 뒷사람의 가방에 신경질적인 시선을 보내고, 내 몸을 기둥처럼 취급하는 일부 어르신들의 터치를 피하기 위해 적절한 구역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 있노라면 당산역에서 출발한 전동차의 창밖 너머로 마침내 한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숨을 돌릴 때 즘 눈앞에 탁 트인 강이 펼쳐지는 장면은 일부러 지하철에 타고 싶을 만큼 감동적이다. 창가를 통해 그 모습을 감상하면서 이어폰 속 평화에 귀를 기울여본다.
엠마스톤이 영화 <라라랜드>에서 불렀던 <Audition>이 흘러나온다.
My aunt used to live in Paris.
I remember, she used to come home and tell us stories about being abroad and
I remember that she told us she jumped in the river once, Barefoot.
She smiled,
이모가 파리에 살았었어요.
이모가 집에 오면 외국에 사는 것에 대해 얘기해주곤 했던 게 기억나요.
한 번은 강에 뛰어들었대요, 맨발로.
이모는 웃으며..
Leapt, without looking
And tumble into the Seine
The water was freezing
she spent a month sneezing
but said she would do it, again
주저 없이 센느강에 뛰어 들었어요.
물은 차가웠고
한 달간 재채기를 해야 했지만
그때로 돌아가면 또 그렇게 할 거랬어요.
잔잔한 음성이 지난주의 감동을 상기시킨다. 두 청춘의 사랑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뮤지컬형식을 차용해 감각적으로 풀어냈던 영화에서 가장 울컥했던 장면이 노래와 함께 가슴에 물들기 시작한다. 이모는 파리에 살았는데, 한 번은 센느강에 뛰어들었다라. 오늘의 선곡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센느강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한강을 지금 감상하고 있으니 이보다 절묘할 수 있을까.
친구들과 미대에 온 것을 후회 하냐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그 선택이 야기할 미지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지 등의 다들 한번쯤 해봄직한 이야기를.
먼저 현실에 대한 볼멘소리들이 오갔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지만 결국은 이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래도 한 달간 재채기를 할 것을 미리 아는게 이득이지 않겠냐면서.
나나 그들이나 찬물에 허우적대다가 한 달 내내 아파봐야 다음을 고민할 수 있는 부류인 것이다.
다시 창밖 너머의 한강을 바라본다.
저 멀리 1억 5천만 킬로미터에서 뜨겁게 작렬하고 있을 태양빛이 달려와서는 따스함만 강물에 풀어놓은 듯하다. 다홍빛과 분홍빛이 몇 겹의 대교를 통과해 번져 흐른다. 빛은 강물을 타고 흘러들어와 수면 위를 달리는 차가운 전동차의 안, 굳어버린 얼굴들 위에 닿는다. 겹겹의 뒤통수들은 따뜻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출근길, 타인의 뒷모습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다른 철로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의 출근길 중 가장 아름다운 인터미션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링거 음악으로는 엠마스톤이 부른 ‘Audition’을 추천한다.
이제 노래의 후렴구가 나오고 있다.
Here's to the ones
who dream
Foolish, as they may seem
Here's to the hearts
that ache
Here's to the mess
we make
꿈꾸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릅니다
비록 그들이 바보같아 보일지라도
부서진 가슴들을 위하여
망가져버린 것들을 위하여
어린아이의 꿈을 간직한 어른은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다수의 시선으로부터 그들은 답답하고 어리석고 현실성이 떨어지며 가정을 이루기에 적합하지 못한 미숙한 사람들로 취급된다.
어떤 이는 돈을 받고 그리는 그림일지라도 자신의 성에 차지 않으면 차라리 일을 엎는 쪽을 택한다. 어떤 이는 그만의 작가정신과 현실 사이에서 고독한 싸움을 이어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한다. 소설가를 꿈꾸는 이는 안정적인 정규직을 마다하고 위태로운 일자리를 택하고는 그만의 세계를 건축할 시간을 짓는다.
그들은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다. 나와 비슷한 옷을 입고서는 왠지 심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배정받은 책상위에서 묵묵하게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당신의 친구가, 혹은 연인이, 눈에 띄지 않던 회사 동료가 가슴속에 몰래 꿈을 간직한 채로 사람들과 살을 비비며, 또 살이 닿을까 피하기도 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전동차를 가득 메운 딱딱한 얼굴들처럼.
강물은 물에 퍼진 잉크처럼 얼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여름날의 냉동고 속 얼음들을 떠올렸다. 냉동고 속 가득했던 육면체의 작은 얼음들이 겨울이 되자 모두 탈출해서 그들의 계절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았다. 햇살은 어제보다 강해졌고, 녹은 강물 사이로는 배가 한척 지나가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버리면, 강물위에서 자유롭게 헤엄쳤던 저 얼음들은 다시 냉동고 속으로 옮겨 가 다음 겨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2분이 채 못 되는 시간, 굳어버린 육체 속 남몰래 간직한 꿈의 온기를 느껴본다. 내게 할당된 시간과 공간의 프레임 속에서 나의 계절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꿈을, 이 아름다운 찰나가 잠시 해방시킨다.
앞의 사람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디디고 선 전동차의 바닥을 지운다. 벽을 지운다. 창문을 지운다. 철로를 지운다. 이 순간 나를 둘러싼 생명 없는 굳은 것들을 하나씩 부숴버린다.
칼 같은 강바람 때문에 머리칼이 제멋대로 나부낀다. 가방을 내려놓고 입고 있던 외투를 던져버린다. 조여 맨 벨트도 던지고 발목까지 달라붙은 청바지도 벗어재낀다. 니트를 벗고 얇은 티셔츠를 벗고 양말을 벗고 가슴을 조이던 브래지어도, 팬티도 모두 다 벗어 던져버린다.
바람을 타고 제멋대로 팔과 다리를 휘적거리며 춤을 춘다.
강을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는 환상적인 속도를, 바람을, 이 겨울의 추위와 햇살을 온몸으로 느낀다.
틀에 갇힌 얼음들아, 저 강물위에서 자유로워지자!
She told me:
A bit of madness is key
to give us new colors to see
Who knows where
it will lead us?
이모가 말했어요.
살짝 미치면
오히려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될거야
그게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줄지 누가 알겠니
And that's why they need us,
So bring on the rebels
the ripples from pebbles
The painters, and poets
and plays
그래서 우리같은 사람들이 필요한거야
그러니 반란을 일으켜요.
조약돌이 만들어내는 물결처럼
화가, 시인, 연극 모두 함께
And here's to the fools
who dream
Crazy, as they may seem
Here's to the hearts that break
Here's to the mess we make
꿈꾸는 바보들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릅니다
비록 그들이 미친 듯 보일지라도
부서진 가슴들을 위하여
망가져버린 것들을 위하여
김연정님의 다른 글이 읽고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