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KEYWORD ONE PAGE <얼음> ㅣ윤성권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2-03 오후 4.16.59.png 재생에너지 연구가


책상 앞에서가 아닌 사람들 속에서 좀 더 현실적이고 모두가 쉽게 접근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재생에너지 정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 프로필ㅣ 윤성권
평소에 꿈을 디테일하게 꾼다. 그것을 각색해서 쓰면 재밌겠다고 생각함




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내려갔다. 따뜻한 겨울이 지속할 것 같더니 이번 주는 연일 영하권을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를 꽁꽁 싸매면 추위를 견딜 만하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밖에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약속이라도 있는 날이면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들에게 괜스레 야속해진다. 아니 욕이 나온다. 지금이야 핸드폰이 있어서 언제 오는지, 어디쯤 오는지 알 수 있지만,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과연 어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 집은 언덕 높은 곳에 있어서 눈이 많이 오면 위험하지 않냐고 묻는 이가 많다. 그러면 나는 언덕은 다른 곳보다 더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눈이 내리면 경비원 아저씨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수시로 눈을 쓸어낸다. 마치 이 언덕을 적에게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자세로 눈과 사투를 벌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딱 군대 시절이 생각난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군대에서 눈을 지겹도록 치워본 것은 아니다. 행정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대부분 열외였고, 대체할 사람이 있는 경우에만 눈을 치우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눈을 치우는 경험은 많지 않지만, 추위에 대한 경험은 적지 않다. 겨울이면 영하 17도를 웃돌았던 강원도 철원은 나이, 성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추위를 선사한다. “하얗게 쌓인 저 눈이 다 밀가루라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겠다”, “눈이 많이 쌓이면 집까지 스키 타고 가고 싶다”, “너무 추워서 주먹이 깨질 것 같다.” 철원의 추위는 사람을 살짝 미치게 한다. 손과 발끝으로 느껴지는 추위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바로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내복을 입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로 목을 싸매도 조금 취약한 곳이 있으면 추위는 그곳만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이불을 덮어도 빼꼼하게 나와 있는 발가락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모기처럼 말이다. 다른 곳은 견딜 만 한 데 발이 너무 춥다. 출근 버스에서 발을 몇 번이나 동동 구르고 떨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재는 만보기가 있었더라면 아침에 10,000보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발이 추운 건 몽골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에 등산화를 신지 않고, 일반 신발을 신으면 동상에 걸리기도 한다. 몽골은 상당히 건조한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겨울에 온도계를 보면 영하 30~40도까지 우습게 내려간다. 대신 건조하기 때문에 추위의 정도가 조금 약하다. 서울의 영하 15~20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면 된다. 내가 몸담았던 시범농장은 겨울이 오기 전에 사료와 건초 등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사놓고, 겨울에 그것이 필요한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나누어 주었다. 건초는 무겁지 않지만, 부피가 크기 때문에 들고 옮기기에 두꺼운 옷이 상당히 불편하다. 그래서 영하 10도가 되는 날을 기다렸다가 건초를 나누어 주었다. 그 이유는 정말로 영하 10도가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꺼운 옷을 벗고 가볍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발뿐만 아니라 손도 시리지만,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있으면 추위는 그것을 장갑으로 인식하고 피해 가는 것 같다. "아메리카노 주세요." "따뜻한 거요? 차가운 거요?" "따뜻한 것으로 주세요." "싸이즈는요?" "작은 걸로요." 천 원짜리 커피 한잔시키는 데 2~3번의 대화가 오간다. 가끔 불필요하게 이타적인 나는 대화를 줄여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작은 걸로 주세요." 한 문장으로 대화를 마친다. 짧은 대화는 비록 경제적이지만 더욱 냉랭하기만 하다. 주문을 마치고 옆에 서서 기다리는데, 통화에 열중하던 뒤 사람은 놀라듯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한다. "네??"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영하 15도의 추운 날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청년 덕분에 차갑기만 한 사람들의 입가에 잠시 따뜻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문득,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게 있다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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