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얼음 땡

KEYWORD ONE PAGE <얼음> ㅣ 이건우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7-02-13 오후 3.13.00.png 영화인


작가프로필 ㅣ 이건우

저는 영화연출을 전공했고, 영화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영화 매니아는 아닙니다.

오히려 스토리 매니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미지나 캐릭터, 혹은 물음표가 있는 설정 등에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착상되면, 마치 꽃에 물을 주며 어떤 나무로 성장할 지 궁금해하는 것 같이 아이디어를 스토리로 키워나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얼음이 된 순간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한창 게임의 룰 속에 몰입해 뜀박질을 하다가 등 뒤의 싸늘한 느낌이 들때면 어김없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음!’ 하고 외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면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나 역시 저렇게 필사적으로 뛰어다녔는데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나를 쿡쿡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이질감은 잠시 이 세상에서 나를 분리시켜주었고, 덕분에 나는 내 주변의 세계를 다시 한번 조망할 수 있었다.

'땡' 하고 주문이 풀리기 전까지 보이던 그 이질적인 세계의 풍경은 나만이 멈춘 세계였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고백하건데 어린 나는 그 순간을 은밀히 즐기곤 했다.


어른이 되고나서는 스스로 '얼음!' 하고 외쳐보려는 생각을 해보지도 못한 것 같다.

아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가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어른의 세계에서 스스로 '얼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마치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속에서 상대방의 사정거리 안으로

스스로 튀어나가 자신을 드러내는 위험천만한 일과 같다.

참호 속을 박차고 튀어나간 나는 목청껏 얼음! 하고 외쳐보지만, 이미 총알은 내 심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블랙핑크의 가사가 불현듯 떠오른다. '내 심장의 색깔은 블랙...아오~'

뒤늦게 얼어버린 나는 '시대의 요구가 심장을 관통하는 도중에 얼어버린 인류' 로 미래의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될 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한다.


아...나는 얼음을 외칠 용기를 잃었다.

얼음을 외치지 못하게 된 이후로 '나만이 멈춘 세계'도 역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깨달은 지금 주변을 곰곰히 돌아봐도 과연 아직도 얼음 땡을 하고 있는 어른들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그말인즉슨, 내가 얼음! 하고 외치면 적당한 타이밍에 내게 와서 땡~하고 터치해줄 그런 동료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물론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아주 작은 얼음땡부터 시작해보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여본다.

음... 전철에서도 가능하지 않는가?

우선 하루를 숨가쁘게 달린 뒤 전철 안 한 곳에 자리를 정하고 나서 재빨리 '얼음!'을 외친다.

그 어떤 나와 관계된 것들 모두와 잠시 안녕이다. 핸드폰도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이어폰을 꽂아도 안된다.

총알을 맞을 각오로 참호 속을 박차고 나가 얼음! 하는 것보다야 훨씬 쉬운 일 아닌가.

무언가에 집중한다기보다 무심하게 내 앞에 펼쳐진 세계와 마주하자.

먼저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하지 말자.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한다!

때가 되면 잊었던 그 이질감이 쿡쿡 찔러 올 것이고 그제서야 비로서 '나만이 멈춘 세계'는 자신을 드러낼 것이니...

기다리자...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면 그것은 '땡~'의 신호이다.

그 역시 아직 얼음땡을 하고 있는 동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솔직히 전철 안에서 누군가와 무심히 눈이 마주친다는 것이 어디 쉬운일인가.

부디 종착역에서 기관사가 땡- 해주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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