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 STYLEㅣ 이건우
영화 <너의 이름은> 중에서
영화에서 처음 '무스비'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은 신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다.
할머니의 이름은 히토하(一葉).
여기서 잠깐 미야미즈 가문의 이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인 미츠하는 한자로 三葉, 즉 잎이 세개라는 뜻이다.
회상에서 잠깐 나오는 엄마가 후타바(二葉), 그리고 미츠하의 여동생인 요츠하(四葉)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적으로 잎이 세장인 미츠하가 주인공인 것은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잎 크로버는 돌연변이이고 그 때문에 행운의 상징이지 않는가? 보통의 잎은 세개인 것이 일반적이다.)
1,000년전 이토모리 마을이 운석 낙하로 인해 탄생한 이후, 그곳의 신사(마을의 정령, 신을 모시는 곳)를 지키는 미야미즈가문의 여자들은 신비한 체험을 해 왔다.
할머니 히토하가 이야기하듯 젊었을 때 모르는 사람과 몸이 바뀌는 체험을 하는 집안 내력이 마치 유전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미츠하의 엄마인 후타바 역시 그랬었고, 지금 미츠하에게 바로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인 타키는 그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듣고서 이 집안의 내력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것을 강하게 깨닫는다.
1,000년만에 다시 찾아온 운석의 위기...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반복되었던 미야미즈가문의 집안 내력.
그리고 지금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에 몸이 바뀐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무스비의 의미로 되돌아가보자.
무스비는 일본어로 結び라고 쓰는데, 한자는 '맺을 결'이다.
맺어주는 것, 이어주는 것, 매듭...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끈을 묶다' 의 '묶다' 에 해당하고, '두 사람이 결혼으로 인연이 되었다' 의 '인연이 되다' 에 해당한다.
미야미즈 가문이 계속해 오고 있는 전통 끈목을 만드는 것도 또 하나의 '무스비'이고,
이 영화는 끈목을 중심 이미지로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무스비라는 언어가 갖고 있는 중첩적인 의미를 음미하면서 이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영화 곳곳에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는 의미들이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종종 깜짝 선물처럼 우리들 마음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영화에서 할머니는 두 손녀를 데리고 신사의 본체에 데리고 가면서 무스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다.
먼저 이 땅의 신령을 옛말로 무스비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끈목을 짜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인연을 맺는 것도
무스비라고 하며, 무스비는 곧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성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영화는 끈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인서트로 잠깐 보여준다.
그리고 할머니는 말한다.
엮이고, 꼬이고, 끊어지고,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또 다시 이어지기도 하는 것...그것이 시간이라고.
할머니의 아리송한 말에 두 손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츠하가 마시던 차를 요츠하에게 건네주자,
그것을 본 할머니가 '그것 역시 무스비' 라고 말한다.
이런 할머니의 아리송한 말은 관객의 마음에서도 궁금증을 자아내고, 영화를 쫓아가야 하는 키워드를 부여받게 된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시간'이란 곧 '무스비'인 것이다.
3년전의 타키와 3년후의 미츠하는 시간의 끈을 풀어내어 다시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무스비를 엮어 나간다.
시간은 뒤죽박죽이지만 둘의 감정은 착실하게 끈목을 매듭지어 나가듯이 엮어나간다.
하지만...혜성의 코어가 갈라지면서 끈은 '툭' 하고 끊어지고말고......
만약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만을 생각한다면
그저 요상한 꿈이었다...라고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타키는 자신의 소명을 계속해서 연기하며 의심한다.
하지만, 혜성이 떨어지기 전 날 미츠하는 타키를 만나러 도쿄로 가서 3년전의 타키와 해후했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자신의 머리에 묶은 '무스비'를 풀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미츠하의 타키를 만나고 싶다는 그 소망이 시간을 점프하여 타키의 마음에 전해진다.
지금의 타키는 부적처럼 생각하고 늘 차고 다니던 손목의 '무스비'를 보며 다시 그 끈을 잇기로, 아니 시간을 다시 이어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그곳! 그곳이라면!!!
신사의 본체가 있는...물길을 건너면 저 세상이라고 말하던 그 본체에 봉납한 구치자케(입으로 되새김해서 만든 술), 그것은 바로 미츠하의 절반. 그녀의 절반을 마시면 어쩌면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시간은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고, 사람의 강렬한 마음에 따라 역전하기도 하고 다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일본의 2011년 3월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한국의 2014년 4월 세월호 사고는 이제는 다시 되돌리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더 이상 시간은 흘러버렸으니 어쩔 수 없어, 다 지난 일이잖아 라고 포기해버린다면, 그 때와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마는 일이 된다.
어딘가 공허한 가슴을 지닌 채 살아가지는 수동태의 삶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카이 마코토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를 잇는 것은 무스비라고, 무스비는 곧 시간이며, 그것의 주체자는 바로 어느 누구도 아닌 '나와 너'라고.
*** 부록으로,
영화에서 타키와 미츠하가 만나는 신비로운 시간대, 황혼녘에 대해서도 덧붙이자면,
황혼은 일본어로 黄昏(타소가레) 라고 하지만, 그 말의 유래는 誰そ彼(타소가레)이다.
彼は誰時(카타와레도끼)라고도 한다.
이 말은 영화에서 선생님이 친절하게 칠판에 써가며 설명해주는 이 영화의 또다른 중요 포인트이다.
誰そ彼를 직역하면, '누구, 그는' 이 되고,
彼は誰時를 직역하면, '그는 누구 때' 라는 말이 된다.
저녁놀이 지어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실루엣으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현상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런 신비스러운 순간인 황혼의 어원이 '그는 누구지?' 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가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메인 이미지가 영화의 신비로운 장면인
황혼의 시간에 시간을 역전하여 마주하고 있는 소년 소녀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