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ONE PAGE <소소하다>ㅣ곽정빈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시중에 출시되는 전자제품이라면 반드시 취득해야 하는 전자파 규격이 있다. 간단히 얘기해서 전자제품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다른 전자제품이나 인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선을 규제하는 것이다. 이런 전자파를 측정할 때는 해당 제품에서 나오는 전자파만을 측정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유입되는 다른 전자파를 차단시키기 위해 특수 설계된 쉴드룸이 필요하다. 당연히 그만큼 큰 부지와 투자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웬만한 대기업이 아니고서야 이런 측정 시험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잦게는 일주일에 두 번, 적어도 이 주에 한 번씩은 외부 시험소로 외근을 나간다. 대개 이런 시험소는 땅값도 싸고 외부 전자파로부터 노출이 적은 한적한 교외에 위치하기 마련인데 내가 주로 방문하는 시험소는 용인에 위치해있다. 자연히 나는 외근이 있는 날이면 왕복 서너 시간의 운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외근이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니다. 시험소를 대여하는 비용이 1시간에 10만 원 안팎이기 때문에 시험이 길어지면 월말 비용정산일이 다가올수록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소에 도착하는 즉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중노동이 이어진다. 혹여라도 결과가 좋지 않아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면, 마치 패잔병마냥 허탈하게 퇴근길 교통체증을 온 몸으로 겪으며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산적해 있는 업무를 뒤로 물린 채 하루 꼬박 세 시간씩을 도로 위에서 허비한다는 것이 결코 달가울 리가 없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일찍 도착하는 것도 아니요, 밀린 업무가 절로 처리되는 것도 아니다. 도로 위 시간을 내가 어찌할 수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나자 그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평소 나는 친구들과 차를 렌트해 놀러 갈 일이 아니고서야 운전할 일이 전혀 없는 장롱면허였기 때문이다. 가슴팍은 운전대에 밀착시키고는 경적이 울리기라도 하면 어깨는 잔뜩 움츠러든 채로 식은땀을 연거푸 닦아내며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는 시간을 몇 번씩이나 거쳐야 했다.
하지만 점차로 운전은 익숙해졌다. 운전대와 가슴은 대양만큼이나 멀어졌고, 어느새 왼손은 옆 창턱에 걸친 채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기에 이르렀으며, 나를 향해 울리는 경적에는 더 큰 경적소리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 외근 날 반 평의 운전대 앞이 내게 소소한 일탈이자 힐링의 공간이 된 것은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먼저 시야가 넓어지자 평소에는 잘 알지 못했던 주변 지명들이 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출입하는 도로가 서부 간선로라는 것과 이 도로가 남으로는 서해안 고속도로, 북으로는 성산대교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구로, 독산동, 대림동, 가리봉동, 고척동이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도로를 따라 흐르는 하천은 안양천이고 그 너머가 광명시라는 것을 점차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지명이 익숙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관련 뉴스와 기삿거리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심지어 내비게이션을 끄게 된 이후로부터는 실제 행동반경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처음엔 실수로 잘못 들어섰던 것이 이제는 매번 새로운 골목골목으로 우회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여지없이 새로운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폐지를 한껏 수거하여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모, 새로 입점하는 거리의 가게들, 줄줄이 힘차게 페달을 밟는 사이클 행렬들, 상권 보호를 외치는 육교 위 플래카드들...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회사를 출퇴근하는 반복된 루틴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과 건물들과 사건이 눈 앞에 펼쳐진다.
매일같이 불평을 늘어놓는 구내식당을 벗어나 여러 맛집에서 외식을 할 수 있는 것도 소소한 재미 중에 하나다. 용인 시험소 근처에 있는 들깨 한방삼계탕은 내 외근 중에 건진 단연 최고의 수확이었다. 그리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4옥타브를 넘나드는 로커가 되어보는 것도, 살며시 액셀을 밟아 뻥뻥 뚫린 고속도로 위를 150km로 내달려보는 것도, 가끔씩 일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오후 노천카페 앞에 차를 대놓고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것도 모두 내 평소 일상에선 그려볼 수 없었던 소소한 일탈이 되었다.
눈을 감고 내일 예정된 외근을 떠올려본다. 시험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 용인에서 회사까지 5km 남짓 남은 지점의 서부간선로를 들어서면 여지없이 '일직-금천 4km 정체'라는 글귀가 LED 간판에 디스플레이 될 것이다. 개미떼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을 뒤따르다 보면 분기점마다 우측에서 합류하는 퇴근 차량의 무수한 끼어들기가 시도될 것이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집스레 1차선으로만 차를 내달리겠지.
이윽고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태양이 안양천과 더불어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의 정수리를 붉게 물들이면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라디오를 틀게될 것이고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꼭 마음에 드는 음악이 흘러나올 것이다. 문득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광명교를 끼고돌아 두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고 다시 두 번째 건물로 들어서서 지하 삼층 B3-15로 주차하는 순간 내 하루의 일탈은 끝이 나고, 시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팀장을 마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내일은 사거리를 지나쳐 가리봉 옛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한다. 낯선 골목을 돌아 나오면 그곳에서 또 기대치도 않았던 소소한 재미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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