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ONE PAGE <썸> ㅣ 이건우
작가프로필 ㅣ 이건우
저는 영화연출을 전공했고, 영화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영화 매니아는 아닙니다.
오히려 스토리 매니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미지나 캐릭터, 혹은 물음표가 있는 설정 등에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착상되면, 마치 꽃에 물을 주며 어떤 나무로 성장할 지 궁금해하는 것 같이 아이디어를 스토리로 키워나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섬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원작 소설 ‘바다 사이 등대’)의 주인공 톰은 수많은 전장에서 끝끝내 살아난 전쟁영웅이 되어 귀향한다.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어온 그는 이미 죽음에 무감각해진 사람이 되어 있고, 그런 사람은 의례 전후의 폐허 더미 속에서 아주 사소한 징조에서조차 희망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사람들 틈에서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법이다. 사실 그 이전에 톰은 자신을 전쟁영웅이라고 칭송하며 극진한 대우를 해 주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머리가 관통한, 지뢰로 하반신이 날아간,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추락한, 전우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마주한 채 묵묵히 견뎌내야만 했다. 그것이 톰 스스로가 말하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는 것에 대한 대가였고, 그래서 톰이 외딴 섬에 가 몇 년이고 사회와 단절되어 생활하는 등대지기의 삶을 그토록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렇게 등대지기가 되고, 홀로 외딴 섬이 된다.
some
지나고 보면 운명이란 some의 집합체인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톰 역시 그랬다. 귀환하는 배에서 내렸을 때 우연히 항구에서 ‘어떤’ 여인이 갈매기에게 밥을 주는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 그녀와 인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육지의 한 가정에서 초대받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여인과 재회한 톰은 그녀의 소소한 비밀을 간직해주는 ‘어떤’ 배려를 하게 되고, 이자벨에게 있어서 그것은 톰의 사람됨이 ‘어떤’ 것이지 알아차리게 하였고, 오빠 둘을 전쟁에서 잃은 차에, 전쟁에서 돌아온 톰은 ‘어떤’ 계시와 같은 것처럼 느껴졌고, 그가 야누스 섬의 등대지기로 다른 세계로 간다는 것은 ‘어떤’ 희망처럼도 느껴졌다. 그렇게, 수많은 ‘어떤 것’들이 모여 운명이 지시하는 방향을 우리에게 알아차리게끔 힌트를 준다. 하지만 선택은 결국 우리가 하는 것이고, 얄궂게도 운명은 모든 ‘어떤 것’들을 미리 보여주지는 않는다. 톰이 배에서 내려 이자벨을 처음 만나기 전, 그가 배에서 만난 ‘어떤’ 여자가 자신의 이후 운명의 퍼즐을 맞추는 마지막 조각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썸
서 오스트레일리아 끝단에 있는 야누스 섬은 남극해와 인도해 사이에 위치해 유럽에서 오는 배들이 항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무사히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올 수 있게 해 주는 첫 입구와도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등대지기를 한다는 것은 단조롭지만 막중한 임무였다. 톰은 언제나 제 시각에 수은등을 밝혀 지나가는 배들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나, 그의 등대에 답신을 하는 일은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톰은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면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멀고 먼 육지에서 톰의 섬을 향해 불빛을 밝히는 이자벨의 편지가 도착한다. 육지에서의 some들이 강한 ssome을 발생시킨 것이다. 머뭇거리면서도, 조심히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는 톰과 당돌하지만 순수하고 용기 있는 이자벨의 편지는 수 만 키로를 사이에 두고 썸을 탄다.
sum (함수)
변수 x와 y사이에 x의 값이 정해지면 따라서 y 값이 정해진다는 관계가 있을 때, y는 x의 함수라고 한다. 톰과 이자벨은 x와 y와 같다. 비단 그들뿐이 아니다.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함수에 기초한다. 단순하게 덧셈, 뺄셈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관계도 있지만, 썸이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면 모든 인간관계 중 가장 복잡한 함수공식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어떤 ‘사랑의 함수’ 라는 통용되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매번 사랑을 할 때마다 둘만의 공식을 찾아내고 진화하는 함수에서 값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답을 구해 낼 수가 없다. 톰이 항구에 내리기 전 만난 some은 이미 사랑을 진행하고 있는 톰과 이자벨 사이의 sum에 작용하면서 복잡한 함수관계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그들에게 위기가 되지만, x인 톰은 자신의 값을, 곧 자신의 신념과 진심을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그 진정성은 결국 y인 이자벨에게 전해져 그녀가 자신의 값을 찾아낼 수 있게끔 해 준다. 톰과 이자벨의 사랑은 아무리 복잡한 함수 관계에 처해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값을 지키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고 버텨내는 것, 상대를 우선시하고 기다리는 것이 그 해답의 유일한 실마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우리 모두는 섬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섬의 등대에 불을 밝히는 등대지기가 되어야 한다. 나의 불빛에 반응하는 some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그 운명의 흐름에 거스르지 말고 온전히 타고 나아가보라! 그것이 진짜 “썸을 타는 것”이지 않을까? 어려운 사랑의 함수관계에 빠지게 된다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이미 자신의 값을 정한 x라면, 자신의 삶에 충실한 등대지기라면, 어떤 사랑이라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