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스토리 ㅣ 한공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송중기처럼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밀롱가에 초급 땅게라 두명이 나타났다.
한명은 눈에 띄는 외모였고 다른 한명도 (반대 의미에서) 눈에 띄는 외모였다.
닉네임은 밝힐 수 없으니 앞 사람을 춘향, 뒷 사람을 향단이라 하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춘향과 향단...새로운 경험을 하고싶어 같이 탱고를 시작했고 같이 밀롱가에 입성했다.
춘향은 끝없이 남자들의 신청을 받았다. 심지어 똑같은 남자가 두세번 연달아 신청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모든 남자와 춤을 추며 행복에 겨워했다. 반면 향단은 계속 앉아만 있었다. 춤추는 친구를 보며 부러워만 했다. 춘향이 춤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이마에 송송 땀이 맺혀 덥다고 손부채질을 했고, 앉아만 있던 향단은 자신의 식은 커피처럼 으실으실 추웠다. 꼬르띠나가 나오는 동안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탱고 음악이 나오자 춘향은 또 누군가에 이끌려 나갔고 향단은 결국 그 자리에 박혀 꽃이 되어 버렸다.
꽃이 된 이야기는 농담이고^^ 두 사람은 계속 밀롱가에 왔고 상황은 항상 똑같이 반복되었다. 앉아있더만 향단은 점점 자신이 초라해졌다. 이 춤은 내가 할 것이 아니구나...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구나...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에 자신과 똑같은 처지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밀롱가에 올때마다 느낀건데 그분도 늘 앉아만 있었다. 아마 초급인지 그의 춤신청을 받아주는 땅게라가 없었다. 향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저랑 춤을 추실래요?"
우울한 표정의 아저씨의 얼굴이 금새 밝아졌다. 발스 음악이 시작되고 둘은 춤을 추었다. 아저씨는 조심스래 걷다가 자꾸 향단이의 발을 밟았다. 향단은 무지 아팠지만 "괜찮아요" 웃으며 다시 아브라소를 했다. 그녀 역시 불안불안하게 걸었지만 밀롱가에서 처음 춰 본 춤이라 나름 행복했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딴따가 끝나고 그녀는 아저씨의 손을 꼭 붙잡으며 "고마워요. 정말 즐거웠어요." 말했다. 그리고 신발을 갈아신고 밀롱가를 나왔다.
바람이 싸늘하게 불어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투다리에 들려 혼자 소주를 마셨다. 그녀는 그 춤이 자신의 마지막 탱고라 생각했고 탱고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자정이 지나서 춘향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천장이 열렸다. 그녀 놀라 눈을 떠보니 하늘에 천사가 보였다.
"누..누구세요?"
"나의 어여쁜 땅게라야, 난 밀롱가의 천사란다."
"절 왜 찾아오셨죠? 제가 뭐 잘못한거라도? "
"그동안 내가 널 쭈욱 지켜보고 있었단다. 너의 마음은 따듯해서 탱고를 아주 잘 할것 같더구나."
향단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하소연했다.
"무슨 소리예요? 제 친구는 많은 남자들에게 신청받지만 제겐 단 한명도 신청하지 않아요. 전 밀롱가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세상과 다르게 사랑이 가득한 곳.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어요. 세상과 하나도 다를게 없어요. 전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해요."
천사는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뺨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친구와 널 비교하지 말아라. 넌 너만의 탱고를 추면 된단다. 수업도 열심히 듣고 쁘락도 열심히 하렴. 그리고 단 한딴따도 못춰도 밀롱가에 꼭 가렴. 쉬지말고 정진하렴. 그럼 언젠가 너도 꿈땅이 될거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아무리 그런다 해도 어떤 남자도 저에게 신청하지 않을꺼예요. 전 차라리 혼자추는 방송댄스나 배울거예요. 그것도 여성전용반에 들어갈거라구요! 남자따위 필요없어요! 전 탱고를 떠날거예요!"
천사는 갑자기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펴서 그녀를 포근하게 감쌌다. 천사는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 느낌은 너무도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온몸이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고 마치 오랫동안 떠나온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처럼 너무도 편했다. 크리스찬이었던 그녀는 늘 궁금했던 천국의 느낌이 이런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기분이 들어 환희에 젖었다. 천사는 향단의 귀에 속삭였다.
" 너가 탱고를 선택한 것이 아니란다. 탱고가 너를 선택했단다."
으아아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긴 내방이고 난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꿈이었구나...
창을 통해 푸른 달빛이 들어와 방안을 가득 비추었다. 뭔가 비밀스럽고 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천사는 온데간데 없지만 천사에게 안겼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탱고가 너를 선택했단다
그 말이 향단의 심장에 박혔다.
그 날 이후로 향단은 수업도 열심히 듣고 쁘락에서 배운 것을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밀롱가도 열심히 갔다. 밀롱가에 갈 때는 이전과 다르게 머리도 의상도 신경써서 최상의 스타일링을 했다. 항상 준비되어 있으면 언젠가 춤을 출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반면 친구 춘향은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최근엔 고수들과도 자주 췄다. 향단은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부러워하지마. 부러우면 지는거야. 난 나만의 탱고를 추는거야. 향단은 다른 사람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평소엔 조급하게 애만 태울 뿐 타인의 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으니 이젠 너무도 잘 보였다. 특히 뭔가 화려한 동작은 없지만 음악에 맞춰 조화롭게 하모니를 이루는 커플의 춤을 보고있을 때면 자신도 춤을 추고있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점점 밀롱가 전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축복의 기운이 가만히 앉아있는 자신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한딴따도 못추고 집에 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향단은 자기 자신 그 자체로 밀롱가의 일부가 된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춘향과 향단은 점점 멀어져 갔다.
춘향은 향단과 떨어져 따로 앉았고 밀롱가에서 오래된 사람들과 친해져 같이 와인도 마시고 수다도 떨었다. 반면 향단은 친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 누군가가 춤신청을 해주었고 밀롱가에 갈 때마다 췄던 사람이 또 신청을 했다. 하루에 적어도 세 딴따는 추었다. 춘향은 밀롱가의 왕자님으로 소문난 몽룡이라는 남자와 요즈음 춤을 많이 춘다. 그는 얼굴도 잘생기고 키크고 몸좋고 입은 옷도 고급스러웠다. 밀롱가가 끝나면 뒤풀이에 빠지지 않던 춘향은 몽룡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몽룡은 자신의 포르쉐로 춘향을 집에 바래다주곤 했다. 향단도 뒤풀이에 따라가고 싶었지만 춘향은 한번도 같이 가자고 안했다. 한번은 향단이 "나도 가도 돼?" 묻자 "음...그러던지...그런데 너랑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많이 어색할텐데..."라고 춘향은 말했다. 향단은 "너가 소개시켜면 안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왠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 그냥 삼키고 집으로 돌아왔다. 춘향은 점점 수업도 쁘락도 빠지고 매일 밀롱가를 갔다. 향단은 춘향을 걱정했지만 춘향은 자긴 몽룡님에게 특훈을 받는 중이라며 괜찮다고 했다. 춘향이 몽룡과 춤을 출 때 향단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왕자님과 춤을 추고 싶은데...왕자님은 어떤 느낌일까? 향단 주위를 살펴보니 많은 땅게라들이 자신과 똑같은 눈빛으로 춘향과 몽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향단,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들과 뭔가 연대감이 느껴져 속으로 속삭였다. 애들아 부러우면 지는거야. 우린 우리만의 탱고를 추자. 많은 남자들이 춘향을 한번 품에 안아보려고 줄을 섰고 춘향은 점점 고수만 가려서 춤을 추었다. 심지어 춤을 춘지 꽤 오래됬고 평판이 좋은 땅게로임에도 공인된 고수가 아니면 단칼에 거절했다. 미간을 찌뿌리며 손으로 X자를 그리는 것이 마치 '네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한테 신청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춘향은 정말 밀롱가의 공주님 같았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향단은 여전히 수업도 열심히 듣고 쁘락도 열심히 한다. 가끔 밀롱가에 가면 이제 많은 남자가 춤신청을 한다. 심지어 어떤 땅게로는 향단에게 '무척 아름답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뻐꾸기를 날리는 것을 알지만 향단은 내심 기뻤다. 그런 향단이 유독 거절하는 땅게로가 한명 있었다. 그는 그녀가 밀롱가에서 첫 탱고를 췄던 그 중년의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도 꾸준히 나왔고 점점 춤을 추게 되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항상 초급 이쁜 여자한테만 신청했다. 심지어 밀롱가에 온지 얼마안된 어리버리한 초급에게는 플로어에서 놔주지 않고 세딴따나 연속으로 추어댔다. 아저씨가 가만히 차분하게 앉아있는 것을 본적이 없다. 꼬르띠나때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안타까운 것은 아저씨와 춤을 췄던 초급들이 시간이 지나며 실력이 늘면 모두 아저씨의 신청을 거절했다. 사람들은 아저씨를 '초킬'(초급킬러)이라 불렀고 그 역시 초급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수근거렸다. 아저씨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향단이가 느끼는 초킬의 이미지
향단이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거울을 보았다. 확실히 살도 많이 빠졌고 이뻐졌다. 연습을 하며 몸을 많이 움직이다보니 체지방도 줄었고 자세도 좋아졌다. 또 밀롱가에 올때마다 꽃단장을 하다보니 스타일링 실력도 는것 같다. 새로 산 원피스가 맘에 들었다. 예전엔 이런 옷 입어볼 줄 꿈에도 몰랐는데...
향단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건너편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고있는 춘향을 보았다. 몽룡님과는 헤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요즘 몽룡님이 꽂힌 땅게라는 따로 있었다. 초급인데 어리고 이뻤다. 춘향이는 언제부턴가 패션에 신경쓰지 않고있다. 매일 밀롱가에 오지만 매일 대충대충 입고 온다. 마치 동네 수퍼 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요즈음 그녀는 춤을 많이 안 춘다. 확실히 신청이 줄었다. 가끔 초급이나 중급 땅게로들이 신청하긴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단칼에 거절한다. 그녀가 거절할 때 표정이 무섭다. 원래 춘향이는 맑고 순수했는데 요즘엔 그녀의 인상에 독기가 서려있다. 요즘엔 밀롱가에서 만났을 때 인사해도 춘향은 향단을 차갑게 외면했다.
향단의 인기는 날로 늘어갔다. 이제 고수들도 그녀에게 춤신청을 했다. 하지만 향단은 초급들과도 많이 추었다. 다소 불편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이 초급 땅게로가 나로 인해 실력이 늘어 계속 밀롱가에 살아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반면 언젠가부터 춘향은 밀롱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향단이는 초등학교때부터 베스트 프렌드였던 친구를 잃은 것 같이 무지 속상했다. 밀롱가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았다. 춘향이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테이블 위의 빈잔을 치우러 왔던 도매니져가 향단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향단이는 도매니져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도매니져는 향단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춘향님은 아마 자기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거예요. 그게 신데렐라의 운명이니까요..."
" 신데렐라요? 그게 뭐예요? "
" 탱고를 처음 시작했을 때 초급이 너무 인기가 많아지면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잘 춘 줄 알게되요. 탱고는 거울효과(상대방에 따라 자신이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가 있으니까 착각하기 쉽죠. 그때 정말 조심해야되요. 춤을 많이 추면 춤센스는 늘겠지만 레슨과 연습을 겸비하지 않으면 6개월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스스로 자기중심도 못잡고, 상하체 분리도 안되고...몸이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의존적으로만 춤을 추게되요. 이 바닥은 결국 춤을 못추면 인기는 사그라들게 되고...본인은 갑자기 사라진 인기에 무척 당황스러울거예요."
" 지금이라도 열심히 연습하면 되잖아요! "
" 네 그렇죠. 하지만 아마 본인도 힘들거예요. 마치 한때 잘나가던 연예인이 갑자기 인기가 추락했을 때 다시 일어서기 힘든 것처럼...자꾸 옛날 생각을 하게되면 현재가 초라하게 느껴지죠. 생각해보세요. 옛날엔 한딴따도 안 쉬고 춤을 췄는데 지금은 계속 앉아만 있으면 밀롱가에 남아있고 싶겠어요? 남들의 시선도 무척 인식하게 될거예요. 춘향님은 아마 어디선가 레슨도 듣고 혼자 연습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기다려주세요. 또 다시 돌아올거예요."
도매니져는 테이블 위의 빈잔을 접시에 올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향단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춘향이 지금의 시기를 잘 견디고 언젠가 돌아오길 소망했다. 참 향단님! 향단 놀라 뒤돌아보니 도매니져가 지나가다 그녀를 불렀다.
"네?"
"요즘 향단님 별명이 뭔지 아세요?"
" 제 별명이요? "
"땅게로들한테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밀롱가의 천사라고"
"밀롱가의 천사요? 왜요?"
"향단님이랑 춤을 추면 마치 천사가 자기를 꼭 안아준 기분이 든데요. 날개로 포근하게 감싼 느낌이라나? 다음에 저도 꼭 부탁드려요^^"
"아...네..."
향단이 당황하며 얼떨떨하게 대답하는사이 도매니져는 총총 걸음으로 홀을 빠져나갔다. 향단은 갑자기 1년전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천사가 자기를 안아주며 내가 탱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탱고가 나를 선택했다고 했던 말. 그리고 언젠가 꿈땅이 될 거라는 말. 내가 느꼈던 천사의 포옹을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느낀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마치 자신의 등에 날개가 돋은 기분이 들어 흘러나오는 밀롱가 음악에 어깨춤이 절로났다.
-HAPPY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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