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새로운 생명 앞에서

FREE STYLE ㅣ 김혜진

by 한공기
20170305_154339.jpg 간호사
저의 키워드는 행복입니다.결국 모든 것이 이 길 위에 있더라구요.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람도, 글과 음악, 인생의 목적과 같은 것들이 행복이라는 틀 안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프로필ㅣ 김혜진


피아노를 전공하고 이후 간호학을 공부하였음.

피아노 치는 간호사

복지와 힐링에 관심이 많음.




황무지

T.S 엘리엇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꽃들이 한바탕 이 땅을 훑고 지나갔다.

여느 해와 다를 바 없이 산수유를 시작으로 개나리와 진달래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벚꽃과 철쭉이 줄 달음질을 쳤다. 언제나 봄이라는 서사시는 그렇게 망각의 겨울을 지워내고 세포 끝까지 닿을 호흡으로 생명의 존귀를 뿜어낸다.

꽃이 피기 전, 이미 이 땅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겨울 내내 촛불로 잉태된 이 나라의 변화를 향한 갈망처럼 말이다.

실로 뜨거웠던 겨울, 십대 청소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통령의 탄핵을 외치는 장면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제야 반쯤 어른인 삼십대에 불과하지만 '어른들이 이 아이들에게 이런 일을 하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는데..' 싶은 마음에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깨가 무거워 진다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며, 가슴 한 켠에 촛불을 끄지 않은채 겨울을 지내었다.

지나간 세대의 수치인듯한 비리와 탄핵을 역사속으로 흘려보내며 새로운 대선주자들이 장밋빛 미래를 외쳤던 지난 4월.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듯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민주주의와 상생 그리고 복지는 어떻게 일구어 낼 것인지, 청산되어야 할 경제구조와 비리들은 희망에 대한 갈증과 뒤섞여 마침내 승리를 외칠 것인지, 헛헛했던 과거를 돌아보다 보니 마음 한 켠에서도 이유없는 칼바람이 분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엘리엇..

그는 현명한 역설가였다. 어쩌면 우리와 같이 질긴 아픔이 그에게도 있어서였을까.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염원에서였을까. 흐드러지게 훑고 지나간 꽃들이 도리어 날을 세워 가슴 깊숙한 곳으로 달려드는 것 같다.

그 어느 때 보다 새로움을 원하는 우리... 우리는 그 역사의 찰나 앞에 당당히 서 있다. 나는 그것을, 그 새로움을 '생명'이라 이름하고 싶다. 그것은 상투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실체로서의 '생명'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폐로 가지 않던 혈액이 비로소 길을 내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잔인한 아픔과 같은 호흡으로 생명이 시작되듯이, 지난겨울 촛불로 잉태된 생명이 마침내 태어난다면 이 땅에는 꽃이 피듯 울음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생명이 여리디 여린 꽃잎과 같이 시작한다 하여도 그 전신은 가늠할 수 없는 운동과 순환을 시작할것이다.

부디 새로운 생명을 얻은 이 땅이, 장구한 역사로 남아있는 황폐한 동상을 부스러뜨리기를...

그래서 박동하는 눈빛으로 빛나기를, 더 이상은 잔인한 계절이 되지 않기를 바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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