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_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이봐, 기가 막힌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내가 겪은 실화인데, 아직도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고 입이 딱 벌어지는 그런 이야기지. 일단 들어나 보라구.
내가 한동안 악몽에 시달리던 시기가 있었어. 그 당시 스트레스가 엄청나긴 했지. 거래처에서 일은 계속 미루지, 상사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남의 돈 먹는 게 절대 쉬운 게 아니야. 더러워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월급 몇 푼 아쉬워서 굽신굽신 하는 내 꼴이라니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
아무튼 며칠 동안 악몽을 꿨어. 사실 악몽이라고 하긴 좀 그런 꿈이었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뭔가 엄청나게 싸우고 도망 다니고 그랬던 것 같아. 그러다가 이상한 동굴 같은 곳을 들어갔는데 방 가운데 커다랗고 투명한 구체가 하나 있고 거기 한 여자가 누워 있는 거야. 아니, 누워 있다기보다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어. 은발 머리가 물결처럼 출렁이고 두 손을 이렇게 모은 채로 말이야.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는데, 와우, 난 그런 미녀는 처음 봤어.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지. 그녀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어. 드디어 오셨군요. 그녀를 구출하는 게 내 임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지.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엄청나게 큰 괴물이 나타나서 나를 공격했어. 이 괴물의 양쪽 뿔에서 광선이 발사되는데, 알아. 유치하지만 꿈이니 그러려니 하라구. 아무튼 그걸 맞으면 즉사하겠더라구. 그 순간에 바보같이 여자가 맞으면 어떡하지 하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놈에게 그만 정통으로 얻어맞았지. 괴물의 파워에 중과부적으로 얻어터지면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다가 잠이 깼어.
온 몸이 땀투성이더군. 나를 보던 그녀의 슬픈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어. 그런데 그녀의 이름이 통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외치던 이름이었음에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지. 그리고 연속해서 3일간 같은 꿈을 꿨는데,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어.
4일째 되던 날, 그날도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었어. 여전히 허탕이었고 부장님한테 욕먹을 생각을 하니 위장이 뒤틀리더군. 뭔가 차가운 걸 목구멍에 집어넣어야겠다 싶어 눈에 띄는 카페로 무작정 들어갔지. 아이스커피를 시키고 근처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자가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랑 들어왔어.
와, 그 여자 몸매가 예술이었어. 아니, 몸이 막 드러나는 그런 옷은 아니었어. 그냥 원피스였는데, 내 눈썰미 알잖아. 몸매 죽이는 여자는 보면 그냥 각이 딱 나오는 거. 그래서 저절로 눈이 갔지. 남자가 주문을 하는 동안 여자는 구석의 테이블에 앉았는데 내가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나랑 눈이 딱 마주친 거야.
그 순간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 바로 그녀더라구! 내 꿈에 3일간 연속으로 나온 그 여자였어. 머리카락 색깔이 은발이 아니었을 뿐, 길게 늘어뜨린 웨이브 머리 하며 그 오똑한 콧날과 눈매 하며, 진짜 그녀였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지. 진짜 뭐에 홀린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다짜고짜 말을 걸었어.
그런데 그 여자가 나를 보는 눈빛이 묘했어. 보통 낯선 남자가 말을 걸면 당황하잖아? 그런데 그녀는 태연하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갑자기 뒤통수가 서늘해지더군. 무슨 말인가 더 해야겠다고 입을 벌린 순간, 마치 막혀있던 정보가 일순간에 뇌로 밀려드는 것처럼 모든 게 명확해졌지.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 거야.
나흘 전의 일이었지. 그날도 부장한테 잔뜩 욕을 먹고 인생 다 때려 치구 싶더라구. 대학 동창인 진구 녀석을 불러내서 진탕 퍼마셨지. 진구는 나보다 더 한심한 녀석이었어. 이직 기간 동안 잠시 쉬는 거라고는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는 딱 백수 그 자체였어. 그날도 어디 피시방에 쳐 박혀 있다가 내 전화를 받고 나온 게 분명했지. 아무튼 그 녀석을 보니까 내 꼴이 그나마 나아 보이더라구.
그렇게 퍼마시다가 진구 녀석이 나를 피시방에 데려갔어. 요즘 뜨고 있는 게임이라나. 그리고 난 완전히 필름이 끊겼었어. 맞아, 눈치가 빠르군 그래. 내가 꾼 꿈은 그 망할 게임의 연장이었던 거지. 그 게임이 재미있기는 했나 봐. 밤새 미친 듯이 게임을 했던 것 같으니까.
그때, 피시방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 게임 마지막에 구출해야 하는 은발의 글래머가 아슬아슬한 부위만 가리고 있던 그 포스터, 지금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가 실제 모델이라는, 그 게임 이름이 하필 그 순간에 튀어 나온 거야. 내가 꿈속에서 그렇게 외치던 그녀의 이름말이야.
레지나!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솔직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더군.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어.
사인 좀 해 주실래요?
화이 님의 글을 읽고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