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불교철학의 핵심- 절대마음

소소하다_한공기

by 한공기
427155_315705241826240_873170111_n 복사본.jpg 마음탐정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송중기처럼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다.



안녕하세요, 마음탐정 한공기 입니다.

7월에 접어들자 날씨가 무척 더워졌네요. 이럴 때는 이곳을 탈출하여 멀리 어디라도 여행을 가고싶은 기분이 듭니다. 바다가 있고 자유가 있는 곳. 그래서 오늘 전 여러분과 함께 항해를 떠나려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Nirvana(니르바나)섬


니르바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생각하셨죠?

네 맞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

오늘 다 함께 그 섬을 찾고 해탈해서 무더위에서 도망치는 것이 어떨까요?


출항을 하기 전 제가 왜 이 여행상품을 기획했나 설명 좀 드리겠습니다.


저의 친가는 불교이고 외가는 가톨릭 입니다.

어릴 적부터 절과 성당을 왔다갔다 하며 종교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가졌습니다.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저의 종교활동으로 인해 제가 전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도 아니고 성당도 아니면 교회를 가야하나? 그런 생각에 20대 후반부터는 교회를 다녔고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고 매일 예배에 참석하는 신실한 크리스찬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렇게 5년 정도 목숨걸고 종교에 열심하다가...

목사님의 위선과 교인들의 집단 이기주의와 분쟁을 경험하면서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교회'라는 모순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종교활동을 접고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화학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 점은 인류가 종교를 갖게 된 것은 '두려움' 때문이고 언제나 종교는 관료적이고 제도적인 시스템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많았다는 것이 사실이고 인간이 스스로 <존재적 사유 기회>를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 신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도 믿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진리'를 구분하는 것이 바른 접근법이라 생각합니다.


종교란...신을 믿고 제의를 드리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각 나라마다 다양한 신이 있고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종교가 <기복신앙: 자신의 복을 비는>이고 기복신앙은 진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즉 절대 진리와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스스로 위로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진리'가 있고 언젠가 우리가 바른 방법으로 진리에 도달할 것이라 믿습니다.

'진리'(지금 당장 증명할 수 없지만) 는 분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월적인 힘일 수도 있고, 인격신일수도 있고, 우주의 질서일 수도 있고,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완전한 시스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하기도 하고 모든 도는 결국 하나이다... 라고 말하나 봅니다. 어쩌면 인류가 무수한 실수를 하고있지만 진리를 찿기 위해, 도를 깨닫기 위해...무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도 도인이 엄청 많은데 자신의 방법이 옳다며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각기 방법은 다 다르겠지만 목적지는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불교철학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것은 지대넓얕 방송과 김도인님의 명상 수업을 통해서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타이밍)이 반드시 존재하나 봅니다. 물론 제가 완전하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 그럼 이제 다같이 떠나볼까요?





먼저 티켓을 나눠주겠습니다.

물론 공짜입니다.




니르바나 섬을 찾아 떠나는 항해

드디어 출항을 합니다.

전 모든 선원들에게 배에 오를 수 있는 티켓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어떤 쪽지입니다.

그리고 전 말합니다.

" 한사람도 빠짐없이 그 쪽지에 대한 대답을 적어주십시오. "


당신은 쪽지를 펼칩니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아하! 선원 명단을 정리하려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뭔가를 곰곰히 생각합니다.


당신은 뭐라고 적었습니까?

일단 이름은 기본이겠고

어떤 이는 자신의 생년월일, 본적, 현주소, 직업 등등 이력서를 제출하신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취미, 특기 등등 앙케이트 답변을 제출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앗 그런데 어떤 분은 아무것도 적지않고 빈상태로 제출했네요.

전 이분께 특등석을 제공합니다.

선원들은 초반부터 반란을 일으킵니다.


"뭐냐! 우린 열심히 적었는데 왜 대우가 이 따위고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 적었는데 왜 그러느냐?"


잠시만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제가 드린 일 질문은 불교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스스로 던져야 하는 화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어떻게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

그게 어렵다면 먼저 주변의 친한 타인을 정의해보세요.


예를 들기 위해 제 친구 '김방구'를 떠올려봅니다.

방구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새님입니다.

방구는 자동차수리센터 사장입니다.

방구는 8살 된 딸과 4살된 아들이 있습니다.

방구는 고기를 매우 좋아하는데 특히 삼겹살보다 목살을 좋아합니다.

요즘 방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트와이스이고 특히 쯔위가 최고로 이쁘다고 하네요.


제가 친구 방구에 대해서 밤새도록 썰을 풀어도 그것이 방구 존재 본질 자체를 정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법을 자신에게 적용해봐도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래도 전 그를 '김방구'라 부르며 매우 쉽게 인식합니다. 그냥 그에 대한 모든 것을 그 이름에 다 때려박습니다. 그것이 매우 편하기 때문입니다. 김방구라고 부르면서 그를 세상의 수많은 사람과 분류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그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과가 사과라는 이름이 없다면 우린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빨갛거나 파랗고 껍질을 벗기면 사각거리는 것이 들어있는데 먹으면 무척 달면서 신맛도 난다. 껍질을 벗기고 그냥 두면 금방 색이 변한다. 씨를 땅에 심으면 비와 태양과 바람을 통해 나무로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바로 그 열매이다.등등등

이 이야기는 불교철학의 <존재론>과 <연기설>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존재는 스스로 홀로 완벽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땅과 태양과 비와 바람이 없으면 사과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무수한 경험과 인연을 통해 그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스스로를 명쾌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 밤새도록 아니 영원히 설명해도 절대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규정할 수 없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실제로 연극에서도 캐릭터를 정의할 때 이런 철학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명해봐...>하면

우린 너무도 쉽게 그의 가문, 나이, 외모, 성격, 직업, 취미 등등을 열거하는데

정통 연극 이론에서는 그런 접근법을 죽어있는 접근법이라 합니다.


오히려 캐릭터란 반응(리액션)이고 어떤 상황에서 그가 대처하는 행위로만 설명이 된다고 합니다.

즉 현재 그가 반응하는 행위...그것을 캐릭터라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자면, 철수는 어떤애니? 누군가 물었을 때

철수는 착한 애야...라고 대답하면 안되고 철수에 관환 에피소드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철수랑 영희랑 수업시간에 전날에 본 예능프로 얘기를 하며 떠들었는데 선생님께 딱 걸렸어. 그때 철수가 선생님께... 제가 영희를 괴롭힌 것이지 영희가 저와 떠든 것은 아닙니다. 하고 말하는거야. 그래서 철수만 벌을 서게 되었지."


이런 식으로 철수의 행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철수는 착하다...라고 하면 너무 모호합니다. 하지만 두번째 설명에서 우린 철수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 철수는 남자답다...철수는 용감하다...철수는 여자를 보호할 줄 아는구나...등등등


결론적으로 캐릭터란 딱 규정지어 단답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캐릭터가 설명되기 위해서 존재 외 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는 예능프로, 영희, 선생님, 수업시간 등등)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 던진 질문과 그것에 대해 여러분이 대답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 내가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자가 나이다."


즉 존재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만을 보는 것입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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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여러분께 Nirvana섬으로 가는 지도를 공개합니다.


" 앗! 뭐야! 아무리 찾아봐도 그 섬은 여기 없잖아!"


누군가 소리칩니다. 다른 사람들도 뭐지? 넌 보이니?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하며 수근거립니다.

네 맞습니다. 그 섬은 지도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야 도달할 수 있는 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지도가 무슨 필요가 있어!"


누군가 지도를 내동댕이 칩니다. 전 그것을 다시 줍습니다.

지도는 필요합니다.

영적 세계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그리고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지도는 불교철학의 시스템 입니다. 불법이라고도 합니다.


혼자 이 지도를 인식하기 힘들테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를 나누는데 전자는 발라이고 후자는 빤디따라고 합니다.


발라-철모르는 어린 애, 끝없는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괴로운 삶의 늪에 깊이 빠지게 됨

빤디따- 어질고 학덕이 있으며 경험이 풍부하고 좋은 충고를 해주는 사람. 이치에 맞는 합당한 믿음을 갖고 명료한 생각으로 감관이 고요하고 맑아서 행동이 섬세하고 말이 온유하다. 지혜가 충만해져서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지속한다.


그리고 발라로 살 것인가? 빤디따로 살 것인가? 선택의 몫을 개인에게 돌립니다.

우리가 이 여행을 하는 이유도 빤디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불교철학과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철학에서의 <나의식>은 무척 다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서양철학: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모든 존재는 숙명적으로 고통스럽다.

불교철학: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생각한다. 생각이 없어지면 고통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제가 교육받은 기독교리는 인간은 신에 비해 연약한 존재이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것은 모두 인간의 죄때문인데 그 죄란 신에 대한 불순종이다. 그래서 신에게 의존하고 순종하면서 고통을 감내하면 사후의 영원한 천국이 보장된다. 여기에 기복신앙적인 접근법이 추가됩니다.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만약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기도의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른 것을 소망했다.


저는 뭔가 이 접근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전 단지 현재에서 행복하고 싶은데, 그 행복을 영원한 미래에 맡겨두고 지금은 고통을 감내하며 기뻐여기라는 생각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망을 담은 각종 헌금을 내라는 교회 시스템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진리는 존재하는데 그 접근법에서 인간의 생각이 끼어들어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철학: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생각한다. 생각이 없어지면 고통이 사라진다.


이 생각은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있는 분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뭔소리???

일단 항해를 하다보면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배는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불행한 이유는...생각이 만든 망상적 프레임과 뇌의 가소성 때문입니다.


인간이 팔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인다고 해서 진정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갇힌 존재입니다. 나의 사고에 갇혀있고, 습관에 갇혀있고, 감정에 갇혀있습니다.


우리가 속박되는 이유는 <실체론적 기대> 때문인데 행복의 기준을 밖에서 찾는 습성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 내가 한달에 적어도 300정도 벌었으면 행복하겠다" 생각했을 때 그 정도 벌지 못하면 바로 불행해집니다.

또 " 아 내가 여자친구가 있으면 행복하겠다." 생각했을 때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으면 계속 불행해집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 삶의 프레임의 한계를 정하고 그 기준으로 행복과 불행을 나눕니다. 또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적 상황...가족의 죽음, 연인과 헤어짐, 해고통보...으로 괴로워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대상에 의존하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뀔 때마다 요동을 치게됩니다.

마치 나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나무 껍데기와도 같고 광활한 사막에서 흩날리는 먼지더미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린 과거를 후회합니다. 그래서 우린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린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고 현재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특히 인간의 뇌는 한번 인식이 고정되면 바뀌기가 힘듭니다. 자발적이든 외부적인 영향으로든 한번 생각의 프레임이 형성되면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플라스틱처럼 한번 굳으면 딱딱하게 고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변형되려면 다시 열처리를 해야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이 새로운 열처리와도 같습니다.


지도에 이름이 적혀있네요. 고집멸도

그것이 이 지도의 이름인가 봅니다.

다 같이 살펴볼까요?


붓다가 발견한 4가지 진리_사성제 - 고집멸도(苦集滅道)


1. 대전제: 고성제 - 인생은 ‘고해’다


“인생은 고해(苦海)다!” 석가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며, 인간은 4가지 고통인 사고(四苦)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가 모두 고통입니다. 이것을 고성제(苦聖諦)라고 합니다. 고성제란... 미혹(迷惑;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인 이 세상은 모두 고통[苦]이라는 것입니다.


2. 원인 : 집성제- 우리는 왜 고통을 받는가?

석가는 인간이 고통 받고 사는 이유는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집성제’(集聖諦)라고 합니다.

석가는 인간은 5가지의 온(蘊)인 오온(五蘊)이 있으며, 이 오온(五蘊)이 일으키는 삼독(三毒) 때문에 욕망에 집착한다고 보았습니다.

석가는 생멸·변화하는 모든 것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한자 온(蘊)은 ‘쌓다’라는 뜻입니다. 오온은 인간으로 보면 육체인 색온(色蘊), 감각·인상인 수온(受蘊), 지각 또는 표상인 상온(想蘊), 마음의 작용인 행온(行蘊), 마음인 식온(識蘊)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쌓여서 ‘마치 자아처럼 보이는 것’- 환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석가는 오온(五蘊)을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삼독(三毒)으로 설명합니다.

석가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맑고 청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부처는 이미 내 마음에 있으며 인간의 심성 안에는 불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삼독(三毒) 때문에 그 착한 심성이 흐려지고 욕망과 집착에 빠집니다. 그 삼독이 바로 ‘탐·진·치’입니다. 이 독들을 불교에서는 흔히 ‘번뇌’라고 말합니다.

탐(貪)은 탐욕의 줄임말로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입니다.

진(瞋)은 진에(瞋恚)의 줄임말로 ‘눈을 부릅뜨다, 성내다’, 한마디로 ‘노여움’이지요.

치(痴)는 우치(愚癡)의 줄임말로 ‘어리석음’입니다.


탐-진-치를 한글로 풀면 확-욱-멍 입니다.

확 쏠리고

욱 분노하고

멍 때리는 것

3. 대안: 멸성제- 인생의 고(苦)에서 벗어나자


석가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면 괴로움이 소멸하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멸성제(滅聖諦)라고 합니다. 멸(滅)은 ‘없애다’라는 뜻이죠.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석가에 의하면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내 오감의 상대성을 깨닫고 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 나를 비우는 것, 즉 ‘공(空)의 경지’이지요.

나를 버리는 무아(無我)를 하지 못하면 무명(무지)의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무(無)와 공(空)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무’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공’은 실체는 있지만 실상 뒤집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석가는 오온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불가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등장합니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우리에게 ‘색즉시공’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유명한 말은, 사실 색(色)의 실체는 공(空), 즉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는 수온·상온·행온·식온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지요.


이 공(空)의 경지는 한 인간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석가는 인간이 욕망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린다면,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자타불이(自他不二), 즉 ‘나와 네가 둘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4. 방법: 도성제-고(苦)가 없는 경지로 가자


그런데 우리가 나를 비우고 고(苦)가 없는 무아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죠? 그래서 석가는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팔정도란 8가지 바른 도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도성제(道聖諦)입니다.

팔정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정사유(正思惟)는 바른 생각을 말합니다. 즉 번뇌에서 벗어난 생각, 노여움이 없는 생각,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생각 등이지요.

정어(正語)는 바른 말,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

정념(正念)은 바른 마음 챙김,

정정(正定)은 바른 집중입니다.


즉 도성제는 바른 견해·생각·말·행위·생활·노력·마음챙김·집중을 하여 8가지 바른 도를 닦음으로써 고(苦)가 없는 경지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고성제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는 것으로 현실세계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집성제는 인간의 심성은 본래 청정했으나 탐욕과 화냄, 어리석음 등 탐·진·치의 삼독으로 인해 욕망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이로 인해 인간은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의 원인, 즉 ‘왜 인생은 고해인가?’를 말해 줍니다.


멸성제는 ‘모든 욕망에 대한 집착을 없애자’, 즉 나를 버리고 제법무아를 하면 열반, 해탈의 경지에 오르며, 그래야 자타불이의 경지에 들어서서 자비를 행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대승불교의 사상입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경지를 보여줍니다.


도성제를 제시합니다. 석가는 바른 도를 닦기 위한 공을 깨닫고 8정도를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해탈에 도달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헷갈리시면 한줄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고는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데 그것은 무명(무지)때문이다. 하지만 수행을 해서 혼란이 소멸되면 열반에 도달한다.



참 쉽죠?


"그렇다치고 도대체 Nirvana 섬은 어디있는거야? 혹시 이거 가짜 지도 아니야? 애초에 없는 섬 아니야?"


누군가 외칩니다.

사실 저도 가본 적이 없는 섬인것이 사실입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섬.

혼자 가보려고 용기내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 도전해 보는 것입니다.

배에서 내리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망망대해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속는셈 치고 한번 계속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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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배고프시죠? 밥이나 먹을까요? 우린 생선을 잡기위해 그물을 던집니다. 오옷! 제법 묵직한 것이 걸렸습니다. 모두 기대하며 그물을 걷어 올립니다. 앗! 이건 뭐지? 어떤 상자가 걸렸습니다.


상자에는 뭐라고 적혀있네요.


악마의 열매 - 이 열매를 먹으면 깨어있게 된다


깨어있다? 뭐야 잠을 안 자도 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인가?

잠을 안 자도 된다면 굉장히 유리하겠군. 하루 24시간을 풀로 쓸 수 있으니 남보다 두배로 살 수 있겠군.

어째든 우리는 이 열매를 나눠 먹습니다.


'깨어있다'의 어원은 '깨다' 입니다.


불교에서는 깨어있지 못하자는 자신의 망상적 프레임에 갇힌 자이고

자신의 삶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삶을 소유하는 마음이란 스스로의 삶을 규정하고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인 사고로 삶을 판단합니다.

과거에 이랬기 때문에 현재게 이렇고 현재에 이렇게 하면 미래에 이럴거야...

이런 생각은 매우 단순한 논리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인연과 만나며 끊임없이 미처 예상못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감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자는 이렇다고 합니다.

- 과거(후회)도 아니요 미래(두려움)도 아닌...지금 현재에 머무른다.

- 탐진치(욕심, 미움, 어리석음)에 휘둘리지 않는다.

- 연기를 안다(인연 – 상호작용)

깨어있지 못하는 이유는 무명(없을무, 밝을명)에 갇혀서라고 하는데

무명에 갇히는 이유는 분별식 사고 판단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좋다-나쁘다


이분법적인 놀리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아이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류합니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성장하면서 우린 선악, 상하, 고지처럼 개념을 끝없이 경계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국가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동네로 동네에서 집으로 집에서 가족적인 위치로...

대학에서 서울위치와 지방위치로 서울위치에서 스카이인지 아닌지로 스카이에서 서울대로 서울대에서 전공으로 전공에서 학점으로 등등등

이렇게 끝없이 경계를 미분하며 나누는 습관의 저변에는 탐심을 바탕으로 한 '좋다-나쁘다'라는 생각이 계속 깔려있고 우린 이런 판단을 통해 규정지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하고

만나자 마자 호구조사를 하며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인식습관이 그물을 만들고 그 그물이 우리를 옥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주관과 객관을 나눈다 ...분리현상

주관은 쉬지 않고 객관을 나누고 가치판단을 하고 좋고 싫음에 따라 취사선택한다.


이런 인식논리는 서구철학에서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서구철학에서는 좋은 것을 ‘이상’이라고 했고 나쁜 것을 ‘현실’이라 상정했습니다.

그리스에서 이상을 형이상학이라 현실을 형이하학이라 불렀습니다.

이분법적 구조에서는 반드시 이분법적 가치관이 발생하고

결국 상정한 이데아를 중심으로 인간은 주변의 현실을 조작하고 나쁘다고 판단되는 것을 파괴합니다.

사회가 합의하여 형이상학의 자리에 어떤 가치를 추대하면 그때부터 구성원은 그 가치를 자신의 현존에서 구현하기 위해 몰두합니다. 실존철학에서는 이것을 ‘현존의 형이상학’이라 부릅니다.

문명사는 현존의 형이상학 실현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이상학의 본질은 진리추구 이전에 탐심이 밑바탕 되어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이상을 실현하고 싶은 탐심에 속아 끝없이 헐떡이게 되어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폭력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대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자신의 양심을 속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인식 자체가 끝이 없는 고통이며 형이상학의 노예라고 얘기합니다.

고상한 현존의 형이상학은 권력의 피라미드를 만들며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를 끊임없이 상대세계로 탈바꿈 시켜 놓습니다. 그래서 이분법적 분별식은 한도 끝도 없고 유위법에는 자유가 제한되어 있고 부족함을 계속 창출한다고 합니다.


단순하게 예를 들면...

<돈이 많아야 행복해진다>라는 이상적 가치를 학습받거나 스스로 생각하게 되면 동시에 불행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깨닫는다'라는 것은 이런 부족함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형이상학에 길들여져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 여기는 사회구조에서는 항상 <상대적인 불행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누구나 비교를 당하고 판단되어집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습관을 버려야 불행도 저절로 없어집니다. 즉 빛이 발생한 순간 그림자도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빛을 없애야 그림자도 없어집니다.


불교에서는

상대세계에 갇힌자를 무명- 중생 이라 하고

상대세계의 인식구조를 부수고 나온 자- 깨달은 자

즉 꿈속에 갇혀 망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꿈 그 자체를 버리라고 합니다.

이 뜻은 영화 '매트릭스'를 보시면 쉽게 이해됩니다. 네오는 그런 구조를 부수고 매트릭스 밖으로 나옵니다. 현실이 매우 초라해 보일지라도 망상이 아닌 진실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한때 저도 망상에 갇혀서 <난 이렇게 살아야 해. 그래야 행복해져>라는 프레임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아름다운 여자친구...그런데 제 수입이 그것을 받쳐줄 수 없었고 그래서 카드 세개를 돌려막기를 하고, 대출을 받아가며 그 삶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외나무 다리를 건너듯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매일 잠을 못 잘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결국 어느 날 제가 매트릭스에 갇혀있다라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매트릭스에 갇히게 된 것이 한국 사회의 잘못된 풍토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문제 원인이 제 스스로에게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집착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초라한 돌아왔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으로 말이죠.


외향상 무척 초라해졌지만, 마음 안에는 자유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물론 그 변화의 과정에서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시선이 제일 걱정되었습니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자존감은 점점 높아져만 갔습니다. 예전에는 붕뜬 마음으로 망상을 꿈꾸며 표류하며 살았는데 이제 저는 현실이라는 바닥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에서는


' 꿈을 깨고 나오면 내가 선 자리가 정토(맑고 투명한 마음)가 되고 자유가 오고 주인이 된다'라고 합니다.

즉 안으로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밖으로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

안과 밖이 뻥 뚫려서 통으로 하나인 절대 세계가 드러나며 모든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입니다.


즉 내가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색안경>을 벗어버렸을 때, 내가 믿고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게 됩니다. 진실된 '절대세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절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무엇도 우위로 나눠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도 극단적으로 쫒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동시에 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며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하는 것이 연기적 세계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라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그리고 경쟁이 아닌 상생을 추구합니다.



"선장 감사하오. 이 열매를 먹고 내가 뭔가 달라진 것 같소. 깨어있게 되었소. 그런데 도대체 우린 어떻게 Nirvana 섬에 도착하는 것이요? 지도에도 없는 섬을 어떻게 찾을 것이요?"


지도를 잘 보시면 정 가운데 다섯개의 수로가 나뉘어져 있는 섬이 보이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 지점에 Nirvana 섬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 있다고 합니다.

함께 가서 찾아봅시다.


우리는 결국 지도 정 가운데에 있는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5개의 수로 한가운데 지점에서 그물을 던져봅니다.

나침반이라 어떻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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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건져올렸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우와! 진주가 가득합니다.

우리는 환호를 지릅니다.


"잠시만 여러분! 우린 나침반을 찾으러 여기 온 것입니다. 좋아하기는 아직 일러요!"


누군가 분위기를 잠재웁니다.


"여보쇼, 아무래도 내 생각에 그 섬은 존재하지 않은 것 같소. 그냥 이 보물을 나눠갖고 돌아갑시다."


누군가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깨닫고 열반에 도달하겠다고 온 사람이 쯧쯧쯧 완전 중생이구만..."

"뭣이라고?"


갑자기 선원들은 싸움을 하게 됩니다.

반드시 Nirvana 섬을 찾게다는 파와 그냥 보물을 가지고 돌아가자는 파가 나뉘게 됩니다.

그때 전 가만히 상자 안의 진주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여러분 잠깐만요!


전 진주목걸이 더미를 들어봅니다.

그것은 진주가 아닙니다. .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다라망>이란 이름의 구슬로 된 그물입니다.


엮어진 수만개의 구슬이 서로를 비추고 있으며 하나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비춰집니다.

진주는 아니지만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뭐 뭐요? 이것도 팔 수 있는거요?"


누군가 묻습니다.


<인다라망>의 의미는...

개별 존재는 전체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전체이다...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이고 내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나와 상대가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인연 차이일뿐,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소멸은 전체의 소멸을 가져옵니다. 공동체란 자유로운 개인의 일시적인 집합이므로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할 수 없기에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선 안됩니다. 전체주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죠. <인다라망>을 통해서 우리는 개인은 우주와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 개인과 전체가 같다? 이해가 안 되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오."


지금 이 배에 탄 우리 모두가 하나의 몸이라고 칩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기관입니다.

전 눈이고 당신은 코이고 당신은 입이고 당신은 위장이고 당신은 척추고 당신은 손이고 당신은 발이고 당신은 세포이고..

그런데 우리는 각기 따로 작용하지만 몸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몸도 '나의식'을 가지고 있고 눈도 코도 입도 등등 모두 '나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단 하나의 기관이 문제가 생기면 몸 전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모두가 소중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몸의 미토콘드리아는 주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을 희생해서 주변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그 미토콘드리아 역시 여전히 몸의 일부로 남아있게 됩니다. 몸도 나의식을 가지고 있고 미토콘드리아도 동일한 나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전체의 나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하! 그럼 우리가 싸울 필요가 없겠군요. 우리는 하나입니다."


선원 모두가 서로 부둥켜 안고 화해를 합니다.

저는 <인다라망>을 하늘 높이 치켜들어 올립니다.

모두가 와! 함성을 지릅니다.


그때 강렬한 태양빛이 인다라망을 비추고 인다라망에 반사된 반짝반짝 빛나며 사방으로 뻗어나갑니다. 우리 배는 그 황홀한 그 빛 안에서 넘실거리며 공중으로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차원이동의 터널을 만듭니다. 배는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우린 지도에 있던 세상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으로 이동합니다.


앗 여긴 어딜까요?

태양과 바다와 섬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우주

그리고 사방에 반짝반짝 별이 빛납니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를 항해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너무나 평온하고 고요한 기분이 듭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남같지 않고 모두 하나같이 느껴집니다.


"서...선장 도대체 여기가 어디요?"


저도 너무 놀라 할말을 잃습니다.

여기는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절대마음의 세계입니다.


"절대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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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의식?"

"심장?"

"기분?"


우린 그런 말을 하곤 합니다.

마음 먹기 달렸다.

마음이 요동친다.

마음가는대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육체 안의 우주

마음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마음이 모든 것의 원천이다.

너의 마음 나의 마음 다르지 않다. 결국 하나이다.

절대마음를 깨달으면 상대세계를 뛰어 넘는다.

아까 인다라망을 가지고 몸과 몸 안의 세포에 비유했을 때

그 몸이 우주 전체라면 세포 하나하나가 개인의 존재이고 몸도 세포도 동일한 절대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포의 마음이 몸의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에 묶여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모두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는 경계를 나누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경계를 허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마음'이 낯설고 인지하지 못한 이유는 서양철학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세계를 상대성으로 인식합니다.


좋은것과 나쁜 것의 상대성

신과 인간의 상대성

행복과 불행의 상대성

나와 너의 상대성


하지만 절대마음을 깨닫게 되면 상대성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럼 요동치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불교에서는 절대마음이 진여심과 생멸심으로 되어있는데

바다에 비유하면

진여심은 바다 자체의 물이고 생멸심은 일시적인 물결이라고 합니다.

절대마음을 깨달으면 작은 물결에 개의치 않게됩니다.

물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시적인 것이기에 나와 동일시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물결을 물결로 아는 과정이 진정한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의 답을 구하려고 애써 찾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답이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지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마음을 깨닫는다...정말 쉬운 것은 아니겠죠.

그래서 '일대사인연'이란 말이 있죠. 마음을 깨닫는 것은 일생에서 하나의 가장 큰 인연

그래서 마음공부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에게 세가지 귀가 있다고 하는데 세번째 귀가 상대방의 마음을 듣는 귀라고 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그 귀를 얻게 됩니다.


"잠깐만 선장, 오늘 우리는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소!"

"그래요! 마음도 중요하지만 몸도 중요하니 우리 밥먹고 합시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리고 절대마음을 깨달은 자는 타인의 배고픔에 함께 배고파합니다.

우린 모두 절대마음 속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선장 이제 알아들었으니까...그만 요리좀 내와주십시오. 거참 말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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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의 메뉴는 토마토 스프입니다.

저는 토마토 스프를 그릇에 담아 모든 사람에게 나눠줍니다.

모두가 기쁜 표정으로 떠먹습니다.


"앗 선장! 스프 맛이 왜 이래? 너무 밍숭밍숭 하잖아! 간을 치긴 친거요?"

"어머 웬일이야. 너무 싱겁다. 이건 스프가 아니라 그냥 토마토 죽이잖아. 토마토 맛 밖에 안 나네. 차라리 나한테 요리를 맡기지..."


여러분 이 토마토 스프의 맛을 잘 음미해보십시오.

이 스프의 이름은 절대토마토스프 입니다.


"절대 토마토 스프?"


제가 이 스프를 내 온 이유는 이러합니다.

우린 오랜 삶의 경험에서 본의 아니게 토마토 스프에 소금도 치고, 후추도 치고, 고춧가루도 치고, 설탕도 치며 살아왔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입맛에 맞춰 살아가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죠. 그래서 토마토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도저도 아닌 토마토 스프만 만들게 되고 결국 진짜 토마토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라도 본연의 토마토 맛을 찾으려면 그동안 습관적으로 이용했던 조미료들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 조미료를 생멸심(일시적인 간)이라 할 수 있겠네요.


화가 나면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짜증이 나면 이건 소금을 듬뿍 넣고

달콤한 것에 미혹되면 이건 설탕을 듬뿍 넣고

거짓말에 미혹되면 미원을 듬뿍 넣고


그래서 토마토 본연 그 자체가 바로 절대마음 입니다.

자성의 완전함은 토마토의 완전함이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만족감입니다.

여러분 한번 눈을 감고 토마토의 맛을 음미해 보십시오.


선원들은 각자 눈을 지긋이 감고 토마토 스프를 떠서 조용히 입에 넣어봅니다.


"처음에는 그저 싱겁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먹어보니 향긋하네요."

"오옷! 자연의 순수함이 그대로 느껴지네요."

"마치 이 토마토가 자란 강원도 산골에 와 있는 느낌이 들어요. 태양 빛에 쐬이고 산들바람이 스치고 맑은 빗방울이 제 위로 떨어집니다."

"맞아요! 내가 이 토마토가 된 기분이 드네요!"


그렇습니다. 절대마음을 깨달으면,

전체와 하나가 되서 흐르는 기분이 듭니다.

즉 '무아지경'에 이르는데 자연스럽게 우주의 흐름을 타는 것이다.

"선장! 그런데 우린 왜 지금까지 이 맛을 정말 몰랐을까요? 왜 조미료를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요?"

"맞아맞아! 나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야. 한번도 그런 생각을 못해봤어."

"아마도 우린 계속 토마토 스프를 만들어 오면서 '토마토'에 대한 인식을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저 맛있는 스프를 만들어야겠다는 강박관념으로만 살아온 것이죠. 내가 쓰는 재료의 특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맞습니다.

우린 그동안 마음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채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마음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무시하고 심지어 자신의 마음까지 마음을 무시하면서...

마음이 병들고 아픈데도 그 마음에 귀기울이지 않고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알아챌 여유가 없었던 이유는 에고가 무척 강했기 때문입니다.

에고에 갇히는 동시에 상대세계에 갇히게 되고

상대세계에 갇히는 동시에 에고에 갇히게 됩니다.

그럼 우린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을까요?

그건 자기가 만든 망상적 이데아...

그것이 바로 지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인 것입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기에 영원히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허상이었던 것이죠.

진정한 행복은 바로 여기, 이곳에, 절대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절대마음은 얻으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존재 자체가 행복이다.

선박 위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린다.


" 그동안 난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어요."

" 저두요, 평생을 뭔가가 되고자 노력하면서...하지만 단 한번도 진정 행복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 집에 돌아가면 제 아이한테도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 저두요, 사실 그동안 의사가 되라고 강요했는데 차라리 쓸모 없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여러분 부처가 태어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죠?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말은 부처가 “내가 짱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가장 근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 선장, 그럼 우리 모두가 절대마음을 깨달으면 Nirvana 섬에 도착할 수 있나요?"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섬에 도착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섬을 더이상 찾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마음을 깨달은 자는 한쪽에 집착하지 않고 전제와 조화롭게 사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됩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참 이름이 아니다

즉 도에 집착하면 도와 멀어지고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우린 어떠한 대립적인 것들 사이에서 한쪽에 치우지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A와 B 대립적인 것이 함께 있고 세계는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 싸운다고 칩시다.

중도란 둘을 섞어서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A도 완전하지 아니하고 B도 완전하지 아니하다- 쌍차(양변을 가로 막는 것)

A도 인정하고 B도 인정한다-쌍조 (양 쪽을 모두 인정하는 것)

쌍차쌍조 동시에 벌어질 때 중도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극단의 선택을 지양하고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는 것입니다.

존재의 발생은 원인이 반드시 존재하고 발생- 변화- 소멸의 무한한 반복과 순환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결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알기 위해서는 거울 앞에 설게 아니라 주변을 거려야 합니다.

그렇게 나를 비우면서 나를 깨닫는 과정을 공空을 깨닫는다라고 합니다.


절대마음을 깨달으면 연기를 깨닫고, 연기를 깨달으면 저절로 공空해집니다.

절대마음-연기론- 공空 을 깨달은 자는 결국 타자에 대한 심각한 고려와 인식을 하게 됩니다.

타자를 나와 분리시키지 않기에 타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죠.

공은 산스크리트어로 '슌야'라 하는데 슌야란 속이 보일 정도로 완벽하게 투명해서 차단되거나 굴정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도 수학이 발견한 0(zero)도 슌야로 표기합니다.


본질인 그것은 본질이 없으며, 본질 없는 그것이 바로 본질입니다.

일체 모든 존재는 ‘특징이 없다’는 단 하나의 특징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개개인을 단정하고 판단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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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린 어느 새 다시 푸른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모두가 맑고 투명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마치 공空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 들었다.


"선장, 고맙소 결국 Nirvana 섬에 도달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 나를 찾는 여행이었소!"

"맞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내가 없음을 깨닫는 여행이었소!"

" 그런데 선장 이제 우리는 현실로 돌아왔소. 나는 변했지만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걱정이 듭니다. 머리를 깍고 절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정답을 알려주시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정답을 찾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정답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절대마음을 믿고 그냥 가시면 됩니다.

절대마음은 절대반지와 같은 것이라 온 세상을 다 얻는 능력을 줍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여러분 모두 주먹을 쥐어보십시오.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소!"


네 맞습니다. 움켜쥐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그 손을 펼쳐보십시오.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

"아! 온 세상이 다 있소!"


네 맞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면 온 세상을 다 가지게 됩니다.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십시오.

소통이란 막힌 것을 뚫어버리고 연결한다는 뜻입니다. 즉 상대방과의 연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상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는 것임을 아시면 됩니다. 소통을 시작하면 모든 것을 나누게 되고 결국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주 전체입니다.

단 세상을 진심으로 대하십시오.

번뇌에서 주화입마에서 탈출하는 열쇠는 오직 진심입니다.

한없이 투명하고 맑은 진심.

절대마음을 깨달은 자는 이제 진실되고 잔잔한 평정심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며

진심은 자기 스스로 복잡하게 얽혀놓은 가시덩쿨을 순식간에 풀어 헤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욕을 했을 때 분노하지 마십시오. 욕먹을 짓을 했다면 욕을 듣는 것이 당연하고 당신이 떳떳하다면 욕을 한자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흔들리지 말고 정진하십시오.

수행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호모 메디타티오가 되십시오. 수행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단 여러분의 향상과 퇴보는 종교적 제식행위가 아닌 개인의 수행에 달려있음을 잊지마십시오.

혹시 유일신을 믿는 분이시라면 그 신에게 나선형으로 다가가십시오.

수평적 삶의 경험을 뛰어넘어 수직으로 다이렉트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임을 잊지 마십시오.


양심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마십시오.

불안과 수치심이 없는 떳떳한 진심만이 정진하게 만듭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마십시오.

거짓에는 선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십시오.

세상에 눈치를 보고 돈이 될까 안될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저 무심한 마음으로 정진하다보면 장인이 될 것이고 장인이 되면 반드시 노력의 열매를 맛볼 것입니다.


무심한 마음을 얻게된 자는 자기 중심이 분명히 잡혀 있고 실력 또한 향상됩니다. 세상만사의 공통 원리를 꿰뚫게 되고 텅 빈 마음으로 일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정확하고도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일이 없을 때는 무심하고 일이 있으면 전광석화처럼 해결합니다.

잡념을 버리고 정공법으로 가십시오.

잔머리를 굴리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려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무심해지면 깊은 속에서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넘치기에 천하가 당신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들숨과 날숨에 집중해보십시오.

자신의 숨을 알아차리면 즉시 현재를 알아차리게 되고 정념이 멈추게 됩니다.


그 숨에서 언젠가 부처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선장! 당신도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잡니다. ”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 온갖 잡생각을 하고, 잠을 자면서도 쓸데없는 꿈을 꿉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보통의 힘을 강합니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마지막으로

여러분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타인을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용서하시고 타인을 진심으로 용서하십시오.

진정한 참회는 감각에 끄달리는 자신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현존의 형이상학에 속아 끊임없이 탐진치를 일으켜 헐떡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고 영원히 반복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악의를 품고 피해를 끼친 그 사람을 이해하십시오.

그 역시 예전의 나처럼 그 틀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그가 틀에서 벗어나는데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절대마음를 깨닫고 상대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 것인가?

상대의 세계 안에 갇혀 쳇바퀴 도는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여러분 자신의 몫 입니다.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나는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왔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뭔가 변해있음을 깨달았다.

길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천천히 걷고있다.

예전에는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쏠려서 굽은 자세로 걷곤 했는데

이제는 허리를 쭉 펴고 머리는 하늘을 향해 발은 땅을 향해서 키가 커져 버렸다.

예전에는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나갔는데

이제는 그냥 발을 바닥에 내려놓게 되었다.

이제야 중력에서 도망치지 않고 중력에 맡기게 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나무 위에 참새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 부록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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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좀 불교철학이 아리까리 하시고 많이 어렵죠?

이 영화를 보시면 한 방에 이해됩니다.

인연이 되면 꼭 보시길 ^^

모두 행복하시고 정진하시길 빕니다.(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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