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술시에만나요_막걸리와 쇠고기면

소소하다 ㅣ 윤성권

by 한공기
KakaoTalk_Photo_2017-08-12-07-44-44.jpeg 재생에너지 연구원
책상 앞에서가 아닌 사람들 속에서 좀 더 현실적이고 모두가 쉽게 접근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재생에너지 정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 프로필ㅣ 윤성권
평소에 꿈을 디테일하게 꾼다. 그것을 각색해서 쓰면 재밌겠다고 생각함




친구 자취방에서 막걸리를 먹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마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가격이 저렴했고, 맛있었고, 항상 무언가에 굶주린 우리의 배를 채워주었다. 안주는 자취방 냉장고에 있는 반찬 아니면 라면이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당시 영웅시대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었다. 현대와 삼성의 설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다룬 드라마였다. 드라마 속에서 현대 정주영 회장(역할 최불암)이 바닷가 야유회에서 신입사원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는 장면이 있었다. 당시 호랑이로 불렸던 정주영 회장은 큰 사발에 막걸리를 따라 주며 사발을 한꺼번에 비워내지 못하는 소위 원샷을 하지 못하는 사원들을 꾸짖었다. “이것도 못 마셔서 무슨 큰일을 하느냐?” 뭐 이런 식이었다. 그중 인상적으로 막걸리를 마신 사람이 있으니 바로 신입사원 이명박(역할 유동근)이다. 사실 그 드라마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MB를 노골적으로 띄워주는 드라마였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에 드라마에 숨겨진 내용은 몰랐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이 있는 막걸리에는 최선을 다했다.


이후 우리는 더 자주 막걸리를 마셨다. 학교생활은 막걸리를 마실 일이 참 많았다. 강의실에서도 마시고, 동아리방에서도 마시고, 잔디밭에서도 마시고, 운동장에서도 마셨다. 행여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잘 마시지 못하는 친구가 있으면 내가 마치 정주영 회장이 된 것 마냥 “남자라면,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셔야지, 남자라면 원샷 해야지” 등등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다. 드라마 영향 때문인지 왠지 막걸리를 잘 마셔야만 영웅이 되는 것 같았다.


편의점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주로 동네 슈퍼마켓에서 막걸리를 구매했다. 그 슈퍼마켓은 지금도 있는 데, 상호는 새로나 슈퍼였다. 당시 새로나 슈퍼는 라면을 싸게 파는 이벤트를 많이 했다. 농심 쇠고기면과 다르게 잘 팔리지 않는 삼양 쇠고기면을 무척 싸게 팔았고, 우리는 항상 막걸리와 삼양 쇠고기면을 구입했다. 당시 막걸리 한 병의 가격이 천 원이었으니, 대략 이천 원 정도면 막걸리 한 병과 라면 1~2개를 살 수 있었다. 쇠고기면을 자주 구매한 것은 가격이 저렴한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한테 언제나 안식처를 내어준 자취방 친구의 역할도 컸다. 부안에서 온 그 친구는 아버지가 소를 키웠다. 우리는 그 친구를 쇠고기 혹은 소간지라고 불렀다. 그래서 쇠고기면이 친숙했나 보다.


종종 선배들이 학교 잔디밭에서 술을 마실 때면 밥을 먹고 술을 마셔야 술에 덜 취한다고 했다. 당시에 선배들은 그것이 마치 대단한 노하우인 것처럼 얘기하며 우리에게 잘 새겨들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한 선배들이 허구한 날 잔디밭에서 토하고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할 얘기가 아니라 본인이 들어야 할 얘기라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도 막걸리 먹을 때는 밥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렇다. 막걸리와 쇠고기면은 밥이 필요 없다. 그 자체가 밥이면서 술이다. 둘의 조화는 정말 환상이다.


자취방에서 라면 먹기 위해 물을 끓이고, 사발에 막걸리를 채웠다. 쇠고기면을 안주 삼아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다. 막걸리병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다른 친구가 자취방에 왔다. 마침 그 친구도 검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담아왔다. 역시 막걸리와 쇠고기면이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남은 국물에 재탕한 쇠고기면을 안주 삼아 술자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술자리가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이제 배가 부르고, 취기가 올라온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또다시 영웅이 된 것 같다. 모두가 영웅이 되는 데 채 만원도 들지 않았다.


윤성권 작가의 다른 글이 읽고싶다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네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