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다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 은미란 : 십대의 마지막에 기획사에 발탁되어 걸그룹을 하다가 23살에 톱스타 민현우와 전격 결혼한 스타. 결혼 후 한동안 방송활동을 쉬고 있다가 최근 드라마 재기를 준비중에 있다.
◎ 민현우: 은미란의 남편. 20대 초반에 길거리에서 발탁되어 스타로 성장한 남자배우.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로 뭇 여성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 최시내: 미란의 친구이자 걸그룹 디브이에이의 멤버였다. 현재는 사업가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사는 주부.
◎ 장난아: 미란, 시내와 함께 걸그룹 D.V.A. 의 멤버였다. 목을 매서 자살했다.
◎ 황제펭귄: 남극에서 사는 연미복의 신사. 극강의 환경에서 최악의 고난을 최고의 귀여움으로 승화하는 동물.
◎ 그 외 엑스트라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시내가 미란을 향해 손짓을 했다. 현우는 먼저 와 있던 영화 팀과 합류했다. 현우가 합석하는 테이블을 눈으로 좇으며, 미란은 시내 옆에 앉았다.
시내가 종이소주잔을 건넸다. 소주병은 이미 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형수가 발견했대. 애인의 시체를 발견하는 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나 되냐? 아유, 끔찍해.”
시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는? 안보이시던데?”
“아까 울다가 쓰러지셨어. 지금 진정제 맞고 계셔.”
“어머니가 충격이 크시겠다. 난아 아버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둘이서면 살았는데...”
“언니야 나이차가 많아서 일찌감치 결혼했으니까. 그래도 마침 어머니가 언니네 가 계셔서 다행이지.”
“그런데 형수 씨는 안보이네?”
“그게...”
시내는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시내는 미란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주잔으로 시선을 떨궜다. 미란이 돌아보니 난아의 언니가 옆에 와 있었다. 언니는 그들의 테이블에 앉아서 미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미란아, 와 줘서 고맙다. 넌 잘 살고 있지?”
난아의 언니는 눈가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옅은 기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네, 언니. 이게 웬 일이래요.”
“나는 난아가 자살 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난아의 언니가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미란은 놀란 표정으로 시내를 돌아보았다. 시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언니는 그런 시내는 상관하지 않고 미란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형수가 수상해. 난아가 형수랑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거든. 아무래도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미란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언니는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점차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난아는 절대 자살 같은 걸 할 애가 아니야! 너도 알지 않니? 걔 지금 2집 준비 중이었잖아. 이번 앨범에는 자작곡도 들어간다고 얼마나 들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 애가 자살이라니?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건, 어제 낮에 인터넷 쇼핑한 게 오늘 배송 됐더라구. 생각해 봐. 자살하려는 애가 무슨 택배 배달을 시키겠니? 안 그래?”
미란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혹시 유서는요? 유서는 있었나요?”
“SNS에 글이 하나 있는데, 이걸 유서라고 보기가 좀 애매하거든. 자, 봐봐.”
시내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난아가 어제 오후에 남긴 글이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을 좇아 돌아돌아 먼 길을 왔습니다.
꿈을 이룰 수 없다면 처음부터 꾸지 말걸 그랬다고 푸념도 했었지만,
이룰 수 있는 꿈만 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차라리 깨지 않는 꿈속에서 살려고 합니다.
남들이 비웃어도 전 꿈을 꾸면서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할겁니다.’
언니는 이를 갈며 말했다.
“봐라, 미란아. 네 눈에는 이게 유서로 보이니? 2집 준비하면서 누가 뭐래도 난 내 갈길 가겠다, 하는 거 아냐, 안 그래? 내 직감으로는 형수 그 나쁜 자식이 헤어지자는 말에 욱해서 난아를 죽이고 자살인 척 꾸민 게 분명해. 이미 경찰이 형수를 조사 중이야.”
그 때 누군가 조문실에 들어섰다. 난아의 형부가 서둘러 언니를 불러갔다. 언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가가 같이 소리 내어 울었다.
“형수는 난아가 일 그만두고 그냥 자기랑 결혼했으면 했나 봐. 난아는 어떻게든 계속 노래를 하고 싶어 했는데, 그걸 이해 못해준다고 불만이었어. 뭐, 형수 말도 일리는 있지. 걔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니까. 난아는 그런 형수를 늘 어리고 철이 없다고 했지만.”
시내는 손가락으로 깍두기를 집었다. 미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넌 형수 씨가... 그렇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어. 난아가 자살을 했다는 것도 안 믿기고, 언니가 하는 말도 일리가 있어. 자살하려는 애가 택배 배달을 시키고 녹음 스케줄을 짜고 그럴 리 없잖아? 그렇다고 자살이 아니라면 뭐야? 더 끔찍하잖아. 난 그냥 이게 다 꿈이었으면 싶다. 아, 기분 졸라 더럽네. 씨발.”
시내는 소주잔을 비웠다. 침묵이 이어졌다. 시내는 한쪽 다리를 접어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기울인 채 먼 산 보듯 빈 벽만 바라봤다. 미란은 빈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언니는 난아가 정신과 치료 받고 있었던 거 알고 있어?”
미란이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내는 소리를 꽥 질렀다.
“뭐? 난아가?”
"쉿!"
미란은 급하게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기자들 쪽을 힐끗 쳐다봤다. 시내는 놀란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너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꽤 오래 됐는데....”
난아의 솔로 앨범은 방송국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가요 프로그램에서 거의 소개되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라디오에서도 좀처럼 틀어주지 않았다. 난아는 새로 옮긴 기획사가 힘이 없어서 그렇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난아의 기획사는 그 대신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잡았다. 하지만 난아는 말로 시간을 때우는 프로그램을 싫어했다.
”내가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헷갈리나 봐.”
난아는 대신 행사를 뛰었다. 적어도 행사를 다니면 좋아하는 노래를 할 수 있었다. 앨범에 실린 곡도 소개할 수 있었다. 난아는 방송에서 잊혀져가는 옛 스타가 될지언정 노래하는 가수로 남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일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행사를 다녀오는 날이면 난아는 꼭 미란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도 나는 3류 가수로서 최선을 다 했어. 장하지? 오늘은 업체 사장이 수고 했다고 밥을 사주는 거 있지. 디브이에이 때부터 내 팬이었대서 처음엔 되게 기분 좋았지. 근데, 룸에서 이 자식이 치근덕거리는 거야. 내 매니저는 뭐 했냐고? 그 사장이 대 주는 행사가 많으니 잘 보이라고 하더라구. 에휴, 이제는 비참하지도 않아. 그래도 이나마 불러주니 행사도 다니고 돈도 벌지, 나이 먹고 인기 떨어지면 어쩌나 싶다. 지금 열심히 해서 돈 모아 놔야 나중에 편하게 먹고 살 거 아냐.”
난아는 겉으로는 밝고 긍정적이었지만, 남몰래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2년 전에 미란이 입맛도 잃고 잠도 못 자면서 눈에 띄게 야위어 갈 때 난아는 미란이 불임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걸렸다며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했었다.
“정신과 치료라고 별 거 아냐. 몸 아플 때 병원 가는 것처럼, 그냥 마음이 아픈 거야. 병원 가서 약 먹으면 나아져. 나 다니는 병원 선생님 되게 좋으시다. 꼭 가 봐, 알았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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