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열 그리고 내성

KEYWORD ONE PAGE <열> ㅣ 이나사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3-28 오후 1.54.13.png 무역업 회사원
필기도구들은 저마다 다른 울음소리가 있다. 슬픔의 울음이 아닌 쓰다듬 받는 고양이의 갸르릉거리는 소리다. 꿀꿀, 짹짹, 멍멍처럼 연필은 - 사각사각 - 소리를 낸다고 한다. 종이 위를 걷은 연필의 발자국 소리가 나에게는 소복소복하고 들린다. 눈이 오지 않아도 함께 걸을 이 없어도 연필 한 자루와 함께 오늘도 나만의 겨울왕국으로 산책을 떠난다.


작가 프로필 ㅣ 이나사

Keyword: 계란 & 치즈 매니아

계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여태 내 곁에 없었다. 그리고 나에겐 늘 계란이 곁에 있었다. 계란의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루에 두 알 이상씩은 꼭 먹는다. 냉장고를 열었는데 온갖 음식으로 가득 차 있어도 계란 칸이 비어있다면 금란현상이 일어나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을 때, 여행 가서 단체 사진을 찍을 때 항상 듣던 소리가 바로 치즈다. 참고로 우리 부모님은 김치 세대다. 치즈 세대라 김치가 없어도 밥을 먹을 줄 아는 나에게 계란이 밥이라면 치즈는 반찬이다. 필살기: 수염 난 턱으로 손등 긁기




우리 인간은 열에 유난히 약하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열에 대한 내성이 약해지고 있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로 시작되는 우리의 조상은 체모로 뒤 덥힌 털복숭이지만 진화 과정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면 어느 순간엔가 팬티를 입고 있다. 인간의 약한 치아로 동물의 가죽을 찢어내진 못했을 테니 적어도 뗀석기류를 다룰 수 있을 정도의 문명에서부터 우리는 속옷부터 챙겨 입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문명의 스노우볼은 계속 굴러가서 언제부턴가 불을 다루게 되고 이때문에 추위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에어컨을 다루게 되면서 더위에도 쾌적한 대처가 가능해졌다. 열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열에 대한 내성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저께는 그 간의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자 저녁 식사를 마치자 마자 자발적인 긴 수면에 몰두했다. 눈을 떴을 땐 새벽 5시였고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의 몸 상태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더위에 잠을 설쳤는데 이제는 자다 추워서 살기 위해 눈 떠야할 정도로 우리 인간은 폭 좁은 온도대에서만 생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열에 대한 약한 내성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쉽게 열받으며 예전보다 쉽게 뚜껑이 열린다. 눈 뜨면서부터 우리는 열이 받아있는 상태다. 아침에 울려대는 기상 알람을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으며 행복하게 끄는 사람이 있을까?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느라 열받고 자가용을 막힌 길을 뚫어내느라 열을 받는다. 출근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또 한 번 남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잠이 들기 전까지 스마트폰 알람에 반응해야 하고 숫자를 지워내야 하며 보통 두세 개씩 깔려있는 메신저에도 대응해야 한다. 이렇듯 온갖 스트레스에 노출되다 보니 감정에 대한 내성도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내성이라는 것은 한 지붕 한 가족인지라 하나의 내성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무너지기 쉽다. 기온이 올라가서 땀이 뚝뚝 떨어지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감정의 평온을 무너뜨리며 감정이 깨지면 건강도 온전할 수가 없고 면역력까지 흔들리고 만다.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몇가지 팁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이해가 쉽도록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겠다. 컴퓨터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내부 온도가 치솟고 내부 냉각 팬이 아무리 열심히 돌아도 흔히 렉이라고 부르는 성능저하를 막을 수가 없다. 이때는 컴퓨터를 재부팅해서 시스템을 새로 돌려주거나 전원을 끄면서 열을 빼줘야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불꽃 튀는 하루를 견뎌내고 열에 대한 강한 내성을 기르려면 감정 컨트롤(내부 냉각팬), 적당한 수면(재부팅), 주말 힐링(전원 끄기) 등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감정 컨트롤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열 받쳐 주체할 수 없을 때 우리의 두뇌는 이 상황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차서 빈틈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를 넓히면 된다. 자신의 머리가 어깨 넓이까지 확대되었다고 생각하면 내 머리 크기와 동일한 부피의 열기만 남게 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걱정 말자. 우리의 머리는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자동차만 한 머리, 자신의 방만한 머리, 집채만 한 머리, 아파트 한 동만한 머리 등 점점 크게 만들다 보면 옥상에서 아이들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듯 자신의 상황이나 화기가 너무나 작게 보이고 결국엔 소멸하게 될 것이다. 옥황상제까지는 못될지라도 옥상상제는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적당한 수면이다. 잠은 미루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회사의 어느 부장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퇴근하고 애들에게 동화책 두 권을 읽어주고 나면 자야 될 시간이라고 한다. 퇴근하고 무언가 해보려 해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자는 시간이 아까워진다. 수면은 우리 내부의 먼지를 털어내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과정이다. 더 이상 청소시간을 미루지 말고 이 시간을 빚지지도 말자.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은 활기도 오르고 감정의 내성도 강해진다.

마지막으로 전원끄기다. 불타는 금요일, 신나는 토요일, 슬픈 일요일. 주 중에 받은 스트레스가 응어리진 채 다음 주로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말자. 각자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겠지만 실행에 옮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주말은 내 것이어야 하지만 주말도 네 것이다. 이럴 때는 목욕탕이나 찜질방에 가자. 씻으러 간다는데 말릴 사람이 있을까? 옷장 안에 옷만 주섬주섬 넣지 말고 고민도 넣어두자. 온탕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심부 체온을 올려보고 마치 태아가 된 것처럼 두리둥실 떠보기도 하며 심신을 태초로 돌려 보자.

환경의 온도적 변화는 계속되는 문명의 발전으로 장시간에 걸쳐 개선되어왔다. 환경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켜 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열에 대한 내성을 기르고 통제할 차례가 되었다. 적어도 감정의 열이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건강을 해치고 가정까지 조각내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첫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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