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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Dec 18. 2017

해물야끼소바

신장개업 상호미정ㅣ 곽정빈

연구원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작년 여름, 홍대 근처 한 이자까야에서 해물 야끼소바를 먹은 것을 기억한다. 반주를 곁들여 요기할 곳을 찾을 생각에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심각한 결정장애로 인해 근 두 시간 가량을 걸어 다닌 참이었다. 무엇보다 허기진 배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를 넘겨가며 밥이 될만한 요리를 찾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해물 야끼소바였다.

시장이 반찬이라는데 더 말해 뭘 하겠는가? 그렇게 내온 야끼소바는 그야말로 눈앞에서 순삭되어버렸다. 그만한 진미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탱탱하게 미끄덩거리는 면발, 적절히 짭조름하고 또 적당히 달콤한 소스의 풍미, 강한 불로 볶아진 재료들이 서로 어울려 내는 감칠맛. 허기에 지쳐 별수없이 들어온 가게가 별안간 홍대 최고의 맛집으로 등극한 순간이었다. 일행과 나는 침을 튀겨가며 주방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있을 일류요리사에게 경외심 가득한 찬사를 보냈던 것이었다.

그 이후, 야끼소바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최근 어느 한 지인의 집들이에서였다. 적어도 당시 내게 있어서는 궁극의 요리였던 야끼소바를 뜻밖의 기대치도 않은 곳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집주인이야 원래 요리를 곧 잘하고 그 나름의 경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마치 이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무심하게 야끼소바를 내어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갓 볶아진 뜨거운 소바 면 위로는 세상에 가다랑어 포까지 얹어져 하늘하늘 춤을 추는데, 그 몸짓을 따라 집주인의 노골적인 자부심이 전해오는 듯했다.

의례적인 칭찬을 하면서 한 젓가락을 들어 맛을 본다. 야끼소바였다. 야끼소바의 맛이 났다. 어느 정도는 아마추어의 맛이 묻어나올 줄 알았는데 꽤나 야끼소바스러운 야끼소바였다. 그렇다고 내가 요리에 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지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악이 받쳤다.

'나도 할 수 있거든?'

집에 돌아와 상상 속의 면발 속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보건대 그다지 특별할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당근, 양파, 양배추 등의 채소와 오징어, 새우 등의 해물, 야끼소바 특유의 맛을 내는 정체불명의 소스와 함께 이들을 마냥 볶아낸 볶음 우동일 뿐이었다. 소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폭풍검색을 한 후에 그건 우스터 소스라는 것을 알아냈다. 우스터 소스가 없으면 굴소스와 설탕을 적절히 배합해 이용해도 된다고 했다. 기름을 충분히 두른 팬에 야채를 볶으며 동시에 면발을 삶고, 야채가 충분히 숨이 죽으면 해물을 넣어 계속 볶다가, 면이 익으면 소스를 천천히 부어 간을 봐가면서 다 함께 그저 계속해서 볶는 것. 그 뿐이었다.




그렇게 야끼소바를 결국 만들어냈다. 한 젓갈 들어 입에 넣어본다. 코웃음이 난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아주 그럴싸한 맛을 낼 수 있다니, 어찌 생각해보면 허무하기까지도 하다. 요리라고 자칭하기에 민망할 지경이다. 그제서야 그 집주인의 얄팍한 생색을 비웃어준다. 야끼소바의 9할은 결국 이 소스의 힘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당연지사 그 디테일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요리라곤 라면 하나 밖에 끓여본 적이 없는, 바로 1년 전 홍대에서 침을 튀겨가며 야끼소바를 찬양해 마지않던 나와 같은 사람이 이 요리를 맛본다면, 우와 너 요리 진짜 킹왕짱 잘한다며 왠갖 찬사를 퍼부었을 것이 분명한 일이다. 냉장고에 늘상 있는 재료라는 듯 가다랑어 포까지 무심한 척 얹어준다면 그야말로 압살이다. 그 순간 나는 일류요리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기사 그런 일들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젠 어느덧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지 세 달이 다 되어가는데, 진도가 빠르게 나가서 이제는 어느새 포커시브 주법을 흉내내기에 이르렀다. 퉁~ 퉁~ 촥~! 하는 소리에 얼핏 팝 아티스트의 것과 같은 그루브가 묻어난다. Major7, minor7 류의 다소 어려운 코드의 변환도 꽤나 능숙하게 해낸다. 단지 현을 퉁기는 정도의 연주만을 생각했을 문외한이 내 연주를 보게 된다면, 정말이지 넌 기타에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며, 어쩌면 신동이 아니냐고 극찬을 늘어 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얄팍하게 아는 수준으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일상에 흔히 있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생각보다 삶은 9할의 소스로 생색내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대학 2학년 선배는 신입생에게, 일병은 이등병에게, 회사 대리가 사원에게... 해당 분야에 단지 먼저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생성되는, 하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9할이라는 거대한 수직의 벽.

하지만 그것을 마냥 얄팍하다 치부해버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자에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 무려 자그마치 '9할'이기 때문이다. 생색내려면 생색낼 법한 일이다. 충분히 누리고 남용할 수 있는 권리자 권력이다. 다만 그들과의 높이 차를 실감하며 생색내기를 만끽하는 동안, 남은 1할의 디테일을 쌓는 이들이 세상엔 또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이번 야끼소바는 전체적으로 눅눅해져 버렸는데, 기름을 좀 더 충분히 두르고, 메밀 소바면을 우동 면으로 바꾸면 한결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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