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시에만나요 ㅣ 윤성권
책상 앞에서가 아닌 사람들 속에서 좀 더 현실적이고 모두가 쉽게 접근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재생에너지 정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 프로필ㅣ 윤성권
평소에 꿈을 디테일하게 꾼다. 그것을 각색해서 쓰면 재밌겠다고 생각함
오랜만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결과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항상 건강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건강검진 결과는 고혈압 의심판정이었다. 내가 고혈압이라고??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멀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술을 자주 마신 것밖에 없는데, 내가 고혈압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술도 자유롭게 마시지 못하고, 음식도 조절하면서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가장 슬픈 것은 앞으로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젊은데, 한창인데, 약을 먹어야만 내 몸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했다. 마치 촉망받던 운동선수가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을 대중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전달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고혈압 의심판정은 말 그대로 의심되기 때문에 한 번 더 혈압측정을 받아야 한다. 다시 받아도 혈압이 높게 나온다면 확정이다.
며칠 뒤 일을 마치고 시간이 남아서 병원에 갔다. 진료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병원에 비치된 혈압측정기로 혈압을 재보았다. 혈압수치가 무려 170mmHg이 넘게 나왔다. 체념했다. 이제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나를 호명하는 소리를 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노인도 아니고 멀쩡해 보이는 젊은이가 다짜고짜 혈압만 측정하러 왔던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내 상황을 자질구레하게 설명했더니 의사 선생님도 결의에 찬 모습으로 정성 들여 혈압을 쟀다.
걱정은 많이 했지만 결과는 싱거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혈압은 여러 가지 상황과 변수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혈압체크 전날에 과음했다면 고혈압이 나올 확률이 높고, 꼭 전날이 아니고, 이틀 전에 과음했어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단다. 그리고 측정 시간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따라 혈압의 높낮이가 출렁거릴 수 있다고 한다. 추가로 병원에서 스스로 측정하는 혈압은 대부분 긴장하기 때문에 수치가 높게 나온다고 한다. 며칠 동안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시간이었다.
오늘로 5일째 연속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손가락 부상으로 술을 멀리해야 할 이 시점에 왜 이렇게 술 약속이 많은지 답답하다. 더구나 지금은 고혈압 사건으로 인해 술을 멀리한 지가 한 달째를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평소였으면 다음에 마시자며 거절할 텐데, 거절하기도 어려운 술자리가 빽빽이 들어섰다. 아마도 첫 단추를 잘 못 끼운듯하다. 나는 5일 전 파운틴 오프라인 모임 중 목공을 하다가 손을 베었고, 즉시 병원에서 치료했다. 심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모임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거기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지만, 소주가 상처를 소독해 줄 테니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에 안심하며 술을 들이켰다.
과거에도 치과 치료를 하고 나면 꼭 없던 술 약속이 생겼다. 막 이때다 싶을 정도로 몰려왔다. 하지만 괜히 술 마셨다가 더 탈이 날 것을 두려워해서 술은 마시지 않고 물만 홀짝홀짝 마셨었다. 반대로 이빨치료를 한 친구가 술자리에 왔을 때 치료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하면 술이 상처를 소독해주고 고통을 잊게 해준다고 설득하고 술을 강요했었는데, 참 후회가 된다. 아마도 그때 쌓은 업보가 지금 돌아오나 보다.
그날을 시작으로 하루만 쉬고, 내리 술을 마셨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할 때 상처가 곪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지만, 회복이 잘되고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더 힘을 내며 술자리로 발걸음을 향했다. 술을 매일 마시는데 회복이 잘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직 실밥을 풀려면 며칠 남았지만, 중요한 술자리가 몇 개나 더 남아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혈압에 이어 손가락 상처를 입으며 건강에 신경을 쓰라는 신호가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다시금 나를 되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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