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제타> ㅣ 한공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송중기처럼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다.
이 아이의 표정을 기억하라.
이 사진은 영화 <로제타>의 마지막 장면이다. 1999년 벨기에와 프랑스가 합작한,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이고 그해 깐느 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영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러하다.
알콜중독자 어머니와 함께 빈민촌 트레일러에서 사는 로제타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공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다.
당장의 식비가 없어서 강가에서 낚시한 물고기로 끼니를 때우고, 헌 옷을 주워서 수선해서 파는 그녀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
하지만 생활보장도 안되고 직장도 못 구하는 그녀는 눈앞이 깜깜하기만 하다.
심지어 알콜중독자 어머니는 동네 아저씨들에게 몸을 팔며 술을 얻어먹고 산다.
로제타는 가끔 끼니를 때우기 위해 들렀던 와플 트럭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남자와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곳에 들를 때마다 혹시 사장이 사람을 구하고 있는지 묻는다.
어머니와 심하게 싸우고 집을 뛰쳐나온 로제타는 그 남자의 집에서 하룻밤 머문다.
육체적 관계는 없었지만, 둘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그녀는 마음이 흔들린다.
남자는 몰래 와플트럭에서 자기가 준비한 와플을 구워서 파는 사실을 로제타에게 고백하고
원한다면 자신을 도와주면서 수익을 챙기라고 제안한다.
로제타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마침내 와플반죽일에 일자리가 생겨 로제타는 마침내 취업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장은 비행청소년인 자신의 아들을 훈육한다며 로제타가 하던 일자리를 아들에게 넘긴다.
다시 백수가 된 로제타는 괴로워하다가 사장에게 친구가 된 와플판매원 남자의 비리를 고발한다.
분노한 사장은 와플판매원 남자를 자르고 그 자리에 로제타를 앉힌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해피엔드일까?
분명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먹고 살길이 급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자신의 친구를 고발하고 그 자리를 본인이 꾀찰수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얼마나 먹고 살길이 급급했으면 그랬을까...뭐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꾸 마음에 뭔가 걸린다.
그것은 마치 로제타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강에다가 던진 낚시 바늘과도 같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어떤 낚시 바늘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난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르고 싶다.
양심은 영어로 Conscience로
con- 은 '모두'를 뜻하게
science는 자연과학을 말한다.
즉 Conscience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연과학'이란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모두 '양심'이 있다.
아무리 스스로 그것이 없다고 부정하고 싶어도 인간인 이상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두가지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1.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삶
2. 자신의 양심을 무시하는 삶
과연 로제타의 선택은 무엇일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충격적이다.
로제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어머니를 침대에 눕히고 냄비에 물을 끓여 계란 한알을 삶는다.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로 가서 와플 사장에게 전화를 한다.
"내일부터 일하러 가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트레일러로 돌아온 그녀는 익은 계란 한알을 까서 먹고 침대에 눕는다.
뭔가 이상하다. 가스렌지에서 쉬익~하는 가스새어나오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그런데 가스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가스통 안의 가스를 다 써버린 것이다.
로제타는 무거운 빈 가스통을 들고 관리인을 찾아간다.
관리인에게 가스비를 주고 새 가스통을 받는다.
새 가스통은 너무 무겁다.
로제타는 뒤뚱뒤뚱 걸으며 가스통을 들고 자신의 트레일러로 힘겹게 걷는다.
너무 무거워서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 가스통을 내려놓고 잠시 쉬다가 다시 가스통을 들고 걷는다.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과 가쁜 숨은 단지 가스통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에서 모터싸이클 소리가 들린다.
로제타가 배신했던 그 청년은 오토바이를 타며 로제타를 맴돈다.
로제타는 그 남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계속 걸어가다가 가스통을 내려놓고 돌멩이를 집어들어 남자에게 던진다.
남자는 잠시 피하다가 다시 돌아와 로제타를 맴돈다.
로제타는 무거운 가스통때문에 앞으로 넘어진다. 그리고 가스통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위 사진은 그 마지막 장면의 로제타의 우는 얼굴이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그 가스통 만큼이나 무거운 <양심의 무게>를 느꼈다.
묵직한 덩어리가 내 심장을 땅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것은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 영화의 여파로 2000년부터 벨기에 정부는 '로제타 플랜'을 세우고 청년실업대책을 발휘했다.
그로 인해 벨기에에서는 학업을 마치고 6개월 이내에 노동시장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취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영화 로제타가 '벨기에의 양심'에 묵직하게 걸린 것이다.
이 영화가 내게 유난히 와 닿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내가 양심을 거스르며 살아온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양심'이 걸릴 때마다 변명을 하곤 했다.
나는 왜 그럴까?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변명을 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니까.
변명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느 정도 팩트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 살면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양심'에 대해 교육받은 적이 없었고
나를 가르쳤던 어떤 교사도 자신의 양심에 충실한 사람은 없었다.
학교 밖에서 만난 모든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부모님도 양심보다는 '돈'이 우선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각계의 권위있는 종교인, 정치인, 기업인, 예술인 등등도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두 자신의 양심을 거스른 이유 때문에 뉴스나 신문에 오르락 내리락 했다.
그들은 한번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쿨하게 사과를 하고 반성하지 않았다.
끝까지 치졸하게 변명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결정적인 증거로 덜미가 잡히면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사라졌다.
우린 그런 나라에 살아왔다.
그렇다고 남탓을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결국 내 삶이기 때문에 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양심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살면 결국 선한 결과를 맞이한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주화입마에 빠지는 이유가 미혹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이 스스로를 자꾸 속이는 미혹
거짓말은 거짓말을 끊임없이 낳고
결국 자기도 모르게 최악의 사태에 치닫게 된다.
'착한 거짓말'은 괜찮다고?
그런 주장이 횡행한 것은 아마도 이 나라가 철저히 반양심적 삶에 익숙해서 일 것이다.
'착한 거짓말'이란 판단은 오직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즉 기준이 자신이 편할 때로 바뀐다면 그것은 자기합리화일 분이다.
난 당신에게 묻고싶다.
착한거짓말을 하고 편한 적이 있었는가?
뭔가 마음에 걸리지 않았나?
착한 거짓말 따위는 없다.
오직 진실과 거짓만 존재할 뿐이고
거짓은 무조건 나쁜 것이다.
양심은 우리의 나침반이니
어설픈 종교활동보다
양심을 똑바로 응시하는 삶이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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