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현상곡ㅣ신정훈
저는 글을 막 씁니다. 브레인스토밍하듯 손가락 가는대로 놔두는 식입니다.
작가 프로필 ㅣ 신정훈
현상을 쿨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즉흥적인 글쓰기 과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모를 수 없는 이름, 스타벅스. 1971년 시애틀 본점에서 시작해, 세계 방방곡곡으로 세를 넓혔다. 현재까지 23,000개 이상의 매장이 생겼다고 하니 그 위엄 대단하다. 45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곤 하지만, 한국 사람들과 알고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카페 문화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기존 가치와의 충돌이 발생했다. 그리고 십 년을 괴롭힐 '된장녀의 아지트'란 꼬리표가 생겼다. 오명을 붙여준 사람 중 하나로 사과를 표한다. 돌아보니 나의 지난 10년은, 많은 카페 중 유독 스타벅스와 접점이 많았다. 그 사이 경제력과 이성 관계의 변천에 따라 관계가 재정립되어 왔다. 그래서 이번엔 시간의 흐름에 맞춰 스타벅스와 나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10년 전, 내가 생각한 적절한 커피값은 200~300원 정도였다. 믹스커피 한 봉의 가격은 백 원이 안 됐지만, 만드는 시간과 수고를 고려해 책정한 금액이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카페를 간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몇 천 원 하는 커피는 사치이자 자본주의에 물든 현대인의 허세였다. 자릿세, 서비스료란 미명 하에 올바른 커피값의 몇 배를 지불하는 것이 무척이나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현명한 소비를 지향하며 살아왔다. 당연히 지폐를 요구하는 커피 한 잔은 '합리적'이란 기준에서 한참 벗어났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입학했다. 시급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여자 동기들을 보며 말세가 왔음을 느꼈다.
군대를 전역해도 멍청한 여자들의 아지트는 건재했다. 부모님께 부담을 줘선 안 된다는 생각에, 복학 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4500원 정도의 시급을 받으며 주 45시간가량 일했다. 일을 시작하고 머지않아 같이 일하는 동갑내기 친구와 교제를 시작했다. 그 친구는 커피를 좋아했고, 카페를 자주 가는 편이었다. 여자친구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커피를 사는 현명하지 못 한 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만 뭐를 해도 예뻤던 연애 초기, 그녀에게 된장녀란 오명을 씌울 수 없었다. 한발 양보해 카페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교제를 위해 대세를 따라야 했다. 카페는 한국 커플에게는 필수로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카페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커피의 맛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문은 항상 핫초코였다. 실은 좋아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마실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몇 번 권했던 믹스 커피의 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탕과 저렴한 프리마의 협업. 소름 끼치게 맛이 없었다. 그렇지만 카페를 찾는 빈도는 나날이 높아졌다. 군대를 전역한 성인으로서 고등학생 때와 같이 데이트를 할 수가 없었다. 영화, 밥, 놀이공원, 전시회 등 어느 정도의 소비는 필수였다. 아낀다고 아껴도 지출은 적지 않았다. 오히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경제적임을 깨닫게 됐다. 스타벅스는 여전히 비쌌고, 이디야, 맥도날드, 롯데리아 같은 저가 커피를 파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즈음 친구의 권유로 아메리카노를 처음 마셔봤다. 기억 속 믹스커피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생각보다 고소하고 맛있어, 그다음 번에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핫초코를 졸업한 순간이었다. 조금씩 커피를 즐기게 되고, 대부분의 시간을 카페에서 보냈다. 시험공부도, 독서도, 대화도 장소는 모두 카페였다. 그리고 서서히 스타벅스나 그 외 비슷한 가격대의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몇 시간 있을 텐데, 시간당 가격에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서서히 변했다.
몇 년이 지나 일본 생활이 시작됐다. 다시 스타벅스와 멀어졌다. 도쿄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고, 필사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번 돈의 대부분을 저축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훌륭한 절약이었다. 식당일을 했는데, 하루 세끼를 가게에서 해결했다. 휴일에는 전날 싸간 밥과 남은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커피 체인점과 멀어졌을 뿐이지, 커피를 멀리하지는 않았다. 동네 맥도날드에서 아메리카노를 100엔에 팔았다. 맥도날드는 더위를 피하기에도 제격이라 공부할 책과 랩탑을 챙겨 주 2, 3일 발도장을 찍었다. 주문 후에는 이 층에 자리를 잡았다. 직원은 가끔 청소할 때나 올라오고, 와도 고객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눈치 볼 일이 없었다. 일이 끝나고 저녁 9시 30분 즈음 도착해 폐점 시간까지 커피 한 잔으로 시간을 보냈다. 커피 맛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카페에 갈 필요를 못 느꼈다. 일본에서도 스타벅스를 비롯한 브랜드 카페들과의 멀어진 사이를 중재한 건 이성 친구였다. 당시 한류 붐이 거세게 불었던 시기였다. 그 덕분에 잘생기지 않은 얼굴임에도 일본 친구들에게 고백을 받았고, 그중 몇 명과 데이트를 했다. 그와 더불어 소비가 조금씩 늘었다. 저축은 꾸준히 했지만, 입금하는 돈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 친구들은 만나면 대부분 더치페이를 했지만, 소비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맞춰줘야 했다. 한국과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100엔 커피 마시러 맥도날드 가자는 말을 꺼내긴 쉽지 않았다. 결국, 억지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스타벅스로 향했다.
"何飲む? 뭐 마실래?"
”えー私はホットコーヒー。 나는 아메리카노"
"ホットコーヒー二つお願いします。これは俺が買う。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이건 내가 산다”
가끔 300엔 남짓의 커피로 생색을 내며 한국 남자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끝나고, 모자란 학비를 벌기 위해 호주로 왔다. 기본 시급이 워낙 높다 보니 버는 돈은 배로 많았지만, 지출을 철저하게 줄였다. 또다시 스타벅스를 위시한 카페들과의 긴 이별이 시작됐다. 삼 개월 정도 도시생활을 하다가 돈과 영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동양인이 거의 없는 오지로 향했다. 백수로 굶어 죽나 했더니, 가까스로 운이 따라줘 투잡을 하게 됐다. 두 개의 일자리 중 하나는 호텔 셰프 보조인데, 일이 끝나면 원하는 만큼 음식을 가져갈 수 있었다. 과일이며, 빵, 시리얼, 우유, 스테이크 등 기분에 따라 가방에 밀어 넣었다. 당시 살던 곳은 호주에서 가장 더운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자전거로 10분이면 그 지역의 끝과 끝을 볼 수 있었고, 브랜드 카페는 없었다. 동네 베이커리에서 빵과 곁들여 마실 커피를 파는 정도였다. 매달 집세를 제외하면 지출은 영에 수렴했다. 특별히 커피가 마시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끔 셰프가 만들어주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시골에서 6개월간의 노동이 끝나고 멜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어느 틈엔가 일본으로 돌아가겠단 계획을 전면 수정해, 호주 정착을 위한 청소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간 모은 돈을 토대로 첫 단추를 끼울 수 있었다. 청소에 요령이 생기고 영어 실력이 나아지며 사업은 빠르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마음도 지갑도 여유가 생겼다. 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카페를 찾았다. 구글맵 어플에 Starbucks를 입력하니, 몇 개의 매장이 근처에서 존재를 과시했다. 먼 길을 돌아왔다. 카페를 가는 것만큼 돈이 덜 드는 활동도 없다. 커피값 4천 원은 절약을 위한 소비가 됐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친구를 만난다. 목적은 영화 감상, 식사, 술, 공부 등 다양하지만, 어디서 보냐란 물음의 답은 멜번역 스타벅스로 귀결된다.
글의 계기가 된 커피 한 잔에 10년이 빠르게 되감겼다. 스타벅스와의 관계에서, 커피와의 관계, 20대의 시작과 끝으로 시선이 커진다. 스타벅스엔 여러 의미가 생겼다. 된장녀의 소굴, 최고의 데이트 스팟, 비싼 맥도날드, 한국 남자-일본 여자의 친목의 장, 도시의 상징, 여유의 성지 등등.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강산 변화 일주기는 커피 체인점의 인상까지도 변화시켰다. 된장녀의 아지트에서부터 합리적인 도시의 쉼터로. 시시한 일상도 합치고 보니 역동적이다. 식었다 뜨거워지기를 반복한 우리 관계가 어떤 국면을 맞이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