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꼬투리가 필요해

날 선 단편 ㅣ 김아소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3-08 오후 5.45.32.png 비목표지향적 프리터


난 이제 이 길을 걷는 게 처음처럼 신나지 않는데, 굳이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도 없는데, 이만큼 했으면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지 뭘, 그들은 목표지향적 인간, 난 되는 대로 사는 인간, 목표가 없으면 어때, 내가 이 길이 좋으면 그만큼 좋아하면 되는 거야.


작가 프로필 ㅣ 김아소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던 암기과목 성적은 언제나 중간 아래에서 허우적댔고, 못하는 걸 더 잘해보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다. 대신 흥미를 느끼는 종목은 그것이 운동이건 공부건 사진이건 혹은 (어쩌다!) 일이됐건, 항상 시작점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선 기량을 보였고, 선생님, 상사에게 잘한다 소리를 들었으며 뒤쳐져 있던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흥미 있던 몇몇 과목이 다행히 국영수여서 별 노력없이 입시를 지나칠 수 있었고, 아직까지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




“꼬투리가 필요해.”

J는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내뱉으며 말했다.


벌써 16년 전인 대학 새내기 시절 동아리 오디션장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큰 키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스모키 화장을 한 그녀는 온통 검정색의 롱코트와 H라인 스커트,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오디션장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마주친 이 무서운 인상의 세 보이는 ‘언니’에게 나는 거의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여 바짝 기합이 들어간 인사를 건넸다. ‘졸업반 선배님이 새내기들 재롱 보러 오셨나보네.’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오디션에 참가한 신입생(재수, 삼수는커녕 다른 신입생들보다 한 살 어린 ‘빠른’ 현역)이었고, 선배들도 이후 술자리에서 종종 그날 오디션에 들어온 J를 보며 자기가 모르는 선배가 복학했나 긴장했었다고 그녀를 놀리곤 했다.


정반대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 내내 붙어 다니게 된 건 아마 그 해 동아리 신입생 중 여자라곤 J와 나 둘밖에 없었기 때문일 거다. 겉보기로는 착실하고 소심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에게 금지되어 있는 것들 - 나이트 출입이나 흡연, 음주, 화장, 가출 등 – 을 굳이 티를 내가면서 하거나 경험담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인종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모범생과 날나리는 서로 무시하고, 나는 저들보다 우월하다는 자기만족으로 뿌리 없이 흔들리는 자존감을 꾹꾹 붙잡아두기 마련이지 않은가. 불과 몇 달 사이에 나는 절대 상종도 안 했을 족속과 절친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께서 우리 딸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든든하다며 나를 예뻐해 주시는 사이, 나는 그녀에게서 담배를 배웠다.


서로 알게되어 가던 때의 우리는 그게 스무살의 특권이라도 되는 양 세상의 고민이란 고민은 다 끌어안고 학교 앞 호프집에서건 커피숍에서건 쉴새 없이 던져진 삶을 원망하고 버거워하며, 작고 허름한 우리들의 공간을 희뿌연 연기로 채웠다. 지붕 없는 곳에서 여자애들이 담배를 피우는 건 꽤나 귀찮은 상황을 많이 초래하던 시절이었다.

“어렸을 때는 뭐 그렇게 사랑에 빠질 일이 많았는지 지금은 도저히 모르겠는 거 있지,"

지금은 남자건 여자건 아님 호랑이건, 대부분의 지붕 아래서 담배를 피우는 게 범죄가 되는 세상이 됐다.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미칠만한 공간을 찾아 미끄러들고 나서야 J는 넋두리를 쏟아냈다.


"연애는 하고 싶은데 도저히 누군가를 좋아할만한 이유가 안 생기는 거야. 매력적인 남자의 퍼센티지가 10년 사이에 그렇게 떨어지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거야? 역시 내가 문젠 거지?”


물론 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그래, 매력적인 남자는 우리가 세상에 반이 남자라며 방심한 사이 다른 여자들이 다 채갔어. 물리적 퍼센티지가 줄어들 밖에.’라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전부가 아닌 걸 그녀도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이제 부모님의 단골 레퍼토리인 ‘언제 결혼…?’ 이야기를 우리에게 꺼내는 것조차 본인들 자신이 지겹고, 지치고, 민망해져 점점 그 빈도가 뜸해질 만한 나이가 되고 나서야 연애가 갈수록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만에 만난 J와 나는 ‘너 아직도 싱글이냐?’를 서로 주고받고 나서야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와 ‘싱글이 뭐 어때서’ 사이에서 애먼 담배 연기만 허공에 흩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사랑에 빠져보기로 했어,” J는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어떤 사람이든 매력적인 구석이 뭔가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이런 저런 단점들을 필터링하기 전에 그 꼬투리에 온 정신을 집중시켜서 그 매력이 내 우주가 되게 만드는거야!”


“... 지랄한다.”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란 게 얼마만큼 충족감을 주는 지 모르는 바 아니고, 이제 삼 년째 그 느낌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누군가 옥시토신 50, 도파민 50 함량의 러브포션을 발명해 주기라도 하면 포터블 링거대를 사서라도 24시간 맞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좀 너무하지 않냐.


“에로스는 어린 애들한테나 관심이 있지, 우리 같이 후덕하고 약아빠진 중늙은이한테는 화살 당기는 손가락 근육 하나 까딱하기 싫어한다고. 그럼 별 수 있나, 알아서 할 밖에.”


픽픽 웃으며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J가 그 놈의 꼬투리를 잘 잡아서 행복한 그녀만의 우주를 창조해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랑에 굶주린, 그리고 앞으로 더 굶주리게 될 게 뻔한 이 시대의 너와 나들에게 어쩌면 자포자기로 가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이 될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쩌면 정말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소맥 세잔에 열이 오른 얼굴 위로 지겹게 뜨거웠던 여름을 밀어내줄 시원한 바람이 스쳐지나주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응답하라 스타벅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