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김아소
난 이제 이 길을 걷는 게 처음처럼 신나지 않는데, 굳이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도 없는데, 이만큼 했으면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지 뭘, 그들은 목표지향적 인간, 난 되는 대로 사는 인간, 목표가 없으면 어때, 내가 이 길이 좋으면 그만큼 좋아하면 되는 거야.
작가 프로필 ㅣ 김아소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던 암기과목 성적은 언제나 중간 아래에서 허우적댔고, 못하는 걸 더 잘해보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다. 대신 흥미를 느끼는 종목은 그것이 운동이건 공부건 사진이건 혹은 (어쩌다!) 일이됐건, 항상 시작점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선 기량을 보였고, 선생님, 상사에게 잘한다 소리를 들었으며 뒤쳐져 있던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흥미 있던 몇몇 과목이 다행히 국영수여서 별 노력 없이 입시를 지나칠 수 있었고, 아직까지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는 재희는 항상 연애 중이었다. 그녀를 알고 지낸 16년 중에서 1년 이상 연애 중이지 않은 그녀를 보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대학 시절 그녀는 동아리에서 두 번의 연애를 했고, 난 그때마다 '대체 왜 그 오빠랑?' 혹은 '걔가 대체 어디가 좋아?'라며 그녀의 선택에 의심을 품다 못해,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려보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사랑에 막 빠진 20대에게 하는 그런 충고는 굶주린 채 나를 노려보는 호랑이에게 '옆 산에는 훨씬 맛있는 노루와 토끼가 많다'고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 이후에도 재희가 만나는 남자들 중에 '좋은, 아니 그냥 평범한 남자친구'라고 생각될만한 사람은 그 비율이 다섯 중에 하나가 될까 말까였다. 재희를 매초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주지 않는다거나,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다거나, 혹은 너무 꾀죄죄하게 하고 다닌다거나 하는 이유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쏘기도 했고, 기념일에는 꽃다발을 안기며 이벤트를 하기도 했으며, 나름의 멋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어떤 '위험함'이 감지되곤 했다. 나는 지켜보는 입장이었기에 그 위험의 본질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항상 그들의 단편적인 행동과 말에 국한되어 있어, 어쩌면 그 말려보겠다는 설득이란 것도 겉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좀 아니지 않냐'를 달고 살아봤자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닫은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네들과의 연애가 끝나고 나서 재희는 '역시 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내가 미쳤지.'를 근의 공식을 빠져나온 x값처럼 토해냈다. 그녀도 그토록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연애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 이후에 사랑에 빠지는 남자들도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고 남을 정도로 위험했다.
고등학교 시절 술 담배와 짙은 화장, 나이트 출입을 즐기고 가출을 일삼는 문제아였던 재희는 사실, 금슬 좋은 부모님 아래에서 오빠 둘의 보호를 받으며 곱게 자란 막내딸이었다. 아버지는 서울 상위권 대학의 존경받는 의대 교수였고, 그녀의 오빠들도 모두 좋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강남 8 학군에서 어려움 없이 교육받고 사랑받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재희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조건들로 규정짓는 것에 신물이 났다.'부잣집에서 사랑받으며 결핍이 뭔지 알 필요도 없이 자라난 네가 인생을 알기나 해? 넌 세상이 아름답지?'라는 시선이 싫어서 그녀는 어린 시절의 반항심과 객기를 버무려 일탈을 저질렀다. '나의 정체성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너희는 그런 단편으로 나를 규정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마지막 연애 이후에 그녀는 예의 전화통을 붙들고 한탄을 쏟아내며 울먹이다가 마침내 진정하고는 잠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매번 이런 남자들만 만나는지 생각해 봤거든. 하나같이 심리적 결핍이 있는 남자들이었어. 주로 애정결핍. 내가 그 사람에게서 잠시라도 떨어져서 다른 일에 집중을 하면 견디질 못한다거나, '너의 어떤 점이 나는 힘들다, 그러니 좀 고쳐보자.'라고 이야기하면 그걸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내가 자기를 떠날 거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식의 방어기제를 펼친다거나."
그랬다. 내가 감지했던 위험이 그런 것이었다. 일상에서는 강한 척하려고 위악을 부린다거나, 항상 밝고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상황에 마주치면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하고, 점점 상대방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그들은 보였던 거다.
"이 사람들 어린 시절에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 부모님이 어렸을 때 이혼하거나,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지긋지긋하게 싸우는 모습만 보면서 자랐거나, 아니면 사별 후에 할머니 손에 키워졌거나. 지금까지도 부모님이랑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 신기한 건 사랑에 빠지는 시점에서는 서로의 가족사나 이런 시시콜콜한 건 서로 전혀 모르고 시작해. 그들도 내가 화목한 집안에서 넘치게 사랑받고 자랐다는 사실은 알 수도 없고 얘기한 적도 없지. 나도 상대방이 애정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나 힘겨운 가족사를 가졌다는 점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서로한테 끌리는 거야. 그리고 이게 반복되다 보니 이제 좀 이해가 갈 것 같아."
"케이스가 쌓이니 이론 정리도 가능해지네. 논문 써도 되겠는데."
"그러게... 그런데 서로의 다른 점에 예외 없이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린다는 거 참 신기하지 않냐. 그리고 이쯤 되니까 타인들이 나를 규정하는 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 같아. 심지어 지금은 나의 외적 조건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이 나에 대해 읽어내는 게 이 정도로 같다고 하면, 그걸 내 정체성으로 받아들여도 틀리지 않는 게 아닐까."
켜켜이 쌓인 이별의 파일들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추출해내려 하다니, 재희답다고 생각했다. 나의 연애는 어땠을까 -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도 그런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었을까, 그들도 나를 규정하는 내 안의 어떤 것들을 보았을까 - 생각해봤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껍데기로 날 규정하고 또 그 모습을 사랑하게 된 걸 거야. 씁쓸하지만 그렇지 않을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기억도 안 날 이유를 상대방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덮어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