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표현하지 않는 아이

3월 공통주제 <정체성> ㅣ 이은혜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4-01 오후 1.51.26.png 은행원
전 삶이 '변화의 연속'이라 생각해요.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된 경험이 있어 그 후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고 나아가 건강하고 자연스런 ‘나’가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은혜

key word: 가족, 직장, 요가, 음악, 꽃, 만화, 빵, 산호수, 변화, 도서관증, 마음챙김, 정로환, 커피




제목 : 딸기
빨기는 왜 이리 빨간걸까?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부끄러워 그렇지!



이 시는 초등학교 1학년 때쯤 썼던 동시였다. 숙제였는지 그냥 맘이 동해서 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저 짧은 문장이 너무 맘에 들어 자랑하고 싶었다. 어머니에게 시를 써놓은 공책을 들고 가서 으쓱거리며 말했더니 어머니가 깔깔거리고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다세대가 거주하는 연립주택이었는데 비슷한 나이 때의 아이들에 많아 윗집, 옆집 아줌마들은 시간이 나면 모여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하셨다. 하루는 아줌마들이 우리 집에 모여 이야기를 한창 하시던 중 엄마가 갑자기 내가 쓴 동시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아줌마들은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 '어머 정말 재밌네~ 너무 귀엽다' 등등 칭찬을 해주셨다. 그 순간 나는 기쁨이나 자랑스러움보다는 내가 엄마에게만 했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말한 엄마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까발려진 것에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닫았다. 나는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학창 시절에도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던 나에게 친구들은 어느 정도 거리까지 다가오다 멀어지곤 했다. 친구들끼리 서로의 비밀과 감정을 공유하며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 당연했던 아이들은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벽을 느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왜 그렇게 되어버리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고 2 때 아버지의 부재를 겪었을 때도 나는 누구 하고도 그 아픔과 고통에 대해 나누지 않았다. 학교에 돌아가 몇몇 친구들이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을 때도 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오히려 슬픈 이야기로 분위기가 어두워지지 않을지 살폈다. 내가 동요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뭔가 바뀌는 것도 아닐텐데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미련하게도 이리저리 올라오는 마음들을 꾹꾹 눌러버렸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계속 그렇게 살아왔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나는 나에 대해, 내 감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뭔가 알아차리게 되더라도 늘 그러하듯 아주 쉽게 꾹꾹 눌러 없는 척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문제였다.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진짜 관계를 만들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은 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분노, 열등감, 불안함, 소외감 등 모든 감정과 원인을 알아차리고 직면하기 싫어도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필요하다면 용기 내어 상대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는 뭔가 말하고 싶어도 꼬이고 엉켜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를 상태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라는 명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상황을 직면하지 못해 회피하고 변명한 것일 뿐이란 것을 나는 정말 아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잃고서야 깨달았다.
예전의 나와 똑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관계를 차단하고 혼자 틀어박히거나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에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때 우연히 읽게 된 책을 통해 마음챙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마음챙김은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지금 이 순간의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드러난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그대로 인지하고 직면하고 인정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작은 삶의 습관들이 하루하루 쌓여갔다. 밖으로 드러나는 큰 변화는 없었지만 나의 내면은 작은 변화의 힘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세상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이 글처럼 솔직한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아직 꽤나 망설여지고 두렵다. 삶은 아마 그런 순간들의 연속일 것이다. 그런 순간을 만날 때마다 믿게 될 것이다. 두려움과 걱정이 파도처럼 몰려와 지나가면 그 자리에 파랗게 용기가 돋아난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 아이와 손을 맞잡고 천천히 조금씩 하고 싶은 말들을 끄집어내 본다. 그것이 아주 서툴고 미숙한 고백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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