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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트라 Nov 16. 2020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고통의 문제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 구약성경 욥기 2:7-10


 마트에 가서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이 가장 빨리 줄어들 것 같은 곳을 선택하면 꼭 내가 계산하려고 선 곳만 좀처럼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확률적으로 3개의 계산대가 있으면 내가 선 줄이 가장 빨리 줄어들 확률은 1/3이고, 나머지 줄이 빨리 줄어들 확률이 2/3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이처럼 세상일이 나한테 안 좋은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을 흔히 ‘머피의 법칙’이라 부른다. 심리적으로도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이기 마련이니 머피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머피의 법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인간 관계의 상당부분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오늘날 더욱 심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리는 SNS의 특성상 내가 접하는 타인의 삶은 희로애락 중 노여움과 슬픔보다는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하게만 보이는 인스타그램 속 그와 그녀에게도 슬프고 힘든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경우가 많다. 희로애락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차이가 생겨나는 지점은 바로 안 좋은 일이 생겨날 때 대처하는 자세이다.


 나의 오래된 친구 A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 경제적으로 시험 공부에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준비한 사법고시도 번번이 떨어져 결국 사법고시가 폐지될 때까지 합격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친구 B는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물질적인 지원을 넘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법고시를 합격하지 못했다. 결국 사법고시를 합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친구는 같은 결과를 받았지만, 사법고시가 폐지된 이후의 두 친구의 삶의 경로는 극명하게 달라졌다.   


  친구 A는 법조인으로서의 꿈을 잃지 않고 사법고시 폐지 이후 로스쿨로 진학하여 변호사시험에 끝내 합격했고 지금은 로펌에서 보람을 느끼며 잘 근무하고 있다. 반면에 친구 B는 그토록 법률가를 꿈꾸었으면서도 정작 사법고시가 폐지되자 로스쿨을 폄하하며 신세한탄으로 오랜 시간을 허비하다 도피성 이민을 가버렸다.


 이미 발생한 과거는 누구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누구든지 바꿀 수 있다. 나에게 닥친 일에 대한 불평과 원망 대신에 현재에 충실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다 보면 과거에 대한 어두운 기억은 어느새 아련한 추억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


 구약성경 욥기는 ‘왜 선한 사람이 고통 받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과응보적 이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은 선한 사람 욥의 의로움을 확인하려는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며 욥에게 전 재산과 자녀를 잃게 하고 신체마저 훼손한다. 욥이 겪는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인생에서 고통의 순간이 느닷없이 갑자기 나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론자이기도 한 C.S.루이스(브런치에 접속하면 나오는 문구-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의 주인공)는 「고통의 문제」와 「헤아려본 슬픔」에서 신이 존재한다면서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역설한 바 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그 고통의 무게를 가늠할 순 없지만, 스스로를 비관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나아가다 보면 때론 그 고통이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의 방향으로 나를 이끄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묻는다. 기쁜 일만 가득한 사람이 과연 행복할까? 슬픔이란 감정도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슬픔이 없으면 감사도 없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에서 안녕은 ‘작별(Adieu)’이 아닌 ‘인사(Bonjour)’의 의미다. 우리는 세상을 알아가며 슬픔이란 감정도 받아들이게 된다.


 신이 내린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은 이랬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욥기 23:10


 성경은 이유 없는 고난을 견뎌 낸 욥이 이후에 더 큰 복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지금의 고난이 미래에 어떻게 연결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반듯한 길이 숨겨져 있다.”

                                                                                     

- 단테, 《신곡》 중 ‘지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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