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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ong Mar 20. 2019

영화 <가버나움>과 어른의 원죄

아이는 죄가 없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부모는 아이에 진다. 왜냐하면 아이의 의견도 안 묻고 세상에 아이를 내놓은 그들의 과실 때문에…"(에세이스트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은 또다시>)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길 선택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의사 확인 없이 던져질 뿐이다. 박선영 전 한국일보 기자는 책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에서 이 구절을 인용해 엄마의 원죄를 말한다. 그러니까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에 대한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결정권 없이 세상에 나온 아이는 약자다. 그래서 부모의 돌봄이, 사회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영화 <가버나움>은 어른의 원죄를 묻는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아이가 불행을 등에 업고 살아갈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는 물음이다. 주인공은 레바논 빈민가에서 태어난 '자인'이란 아이다. 출생신고도 없이 나고 자라 12살로 추정된다. 자인의 삶은 힘겹다. 보통의 12살보다 작은 체구로 물건을 나르며 일을 한다. 거리에 나가 주스도 판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자인의 밑으론 4명이 넘는 동생들이 있고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방치한다. 잠깐 학교에 보내려는 시도는 한다. 학교에 가면 음식을 얻어올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디에도 아이를 헤아리는 마음은 없다. 


자인과 동생 사하르, 둘은 서로에게 의지한다 (출처: 다음 영화)

그나마 자인이 마음을 두는 건 한 살 터울의 여동생 사하르다. 그런데 동생이 생리를 시작한다. 자인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고작 11살의 나이에 동생은 동네 슈퍼마켓 주인과 결혼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팔려갔다. 자인은 삶의 커다란 의미를 뺏긴 듯 절망했다. 어쩌면 지독한 삶의 버팀목이었을지 모를 동생이었다. 자인은 동생이 팔려간 현실에서 벗어나려 동생과 밥 먹고 잠자던 집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12살의 아이에게 거리는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 집이나 거리나 배고프고 외로운 건 매한가지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거리를 헤매다 자인은 라힐을 만난다. 불법체류자에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아기를 홀로 키우는 엄마. 라힐이라고 나은 것 없는 삶이지만 자인을 집에 데려와 먹이고 재운다. 라힐이 일하러 나가면 자인은 그의 아기 요나스를 보살핀다. 그러다 라힐이 단속반에 걸려 집에 돌아오지 못하자 자인은 요나스와 힘겨운 동행을 시작한다. 보살핌 없이 자란 아이가 아기를 보살핀다. 


자인과 요나스 기댈 곳 없는 두 아이가 거리를 헤맨다 (출처: 다음 영화)

자신의 부모는 하지 못한 일을 자인을 해내려 한다. 씻기고 먹이고, 재우면서. 무엇보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래 봐야 12살 아이가 버티는 덴 한계가 있다. 요나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인의 눈에는 눈물이 쏟아졌다. 앞선 장면을 회상해보면 정작 자신의 딸을 팔아버린 자인의 부모는 울지 않았다. 자인은 부모와 달랐다. 요나스를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 아파했고,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이를 챙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요나스를 포기하며 느꼈을 자인의 고통은 그의 부모에겐 논외였다.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까

자인이 부모와 다시 제대로 대면하는 건 법정에서다. 자인이 사하르가 팔려간 슈퍼마켓 주인을 칼로 찔렀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자인이 사하르가 없는 존재가 됐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일이 벌어졌다. 사하르는 11살의 나이에 임신해 죽고 말았다. 자인은 법정에서 그간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태어나서 듣는 건 욕이 전부고,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외친다. '삶의 이유와 목적' 그런 고귀한 단어는 애초 자인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보다 거리가 익숙한 아이들 (출처: 다음 영화)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지만, 세상은 자인이 감당하기엔 버겁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 자신을 챙기는 이가 없다. 일차적으론 책임지지 못할 아이를 낳은 부모에게, 나아가선 가난에 허덕이는 약자를 구하지 못하는 사회에게도 죄가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 불행의 책임을 묻고 물으면 그건 나쁜 세상을 방조한 어른의 죄다. 


좋은 가정, 그리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 결국, <가버나움>이 말하는 건 그런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갈 세상이란 게 천국은 되지 못해도 살만 한 세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세상에 내던져진 수많은 자인을 위해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어른의 원죄가 있다면 그건 세상 가장 약한 존재이자 죄 없는 아이가 불행을 맞닥뜨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좋은 세상이란 걸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원죄를 씻어 내는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신발보다 더러운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자인의 고통은 부모를 넘어 어른 모두에게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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