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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ong Mar 20. 2019

영화 <죄 많은 소녀>와 소녀의 절규

절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두가 영희를 죄인으로 몰고 간다. 같은 반 친구가 죽고, 그 죽음 이전까지 함께 있었다는 이유다. 영희는 그렇게 '죄 많은 소녀'가 됐다. 이 영화는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 동급생, 선생님, 경찰, 부모 제각각 다른 모습이다. 죄 많은 소녀가 된 영희의 절규는 죽음에 대처하는 이들의 민낯을 까발린다. 


경찰은 사건의 책임자를 찾고, 수사기록을 남겨야 한다. '(경민이)죽음을 말할 만한 말을 네가 한 건 맞구나?'라며 영희를 신문하고 책임자로 몰아간다. 영희가 경민을 죽였을까. 경민이는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경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 마음을 알 길 없는 경찰은 남은 CCTV와 주변의 진술들로 영희를 죄인이라 본다.


영희를 신문하는 경찰, 오직 경민을 누가 죽게 만들었는지가 중요하다 (출처: 다음 영화)

영희는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지 않는 것 같다. 경민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경민은 자신의 자살 계획을 빼앗고 자신보다 먼저 죽은 게 다다. '(경민이) 어딘가에 살아서 나를 엿 먹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영희는 말한다. 


동급생들 역시 경민의 죽음에 반응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경민은 친구가 많지 않았다는 데, 경민이 죽고 나니 반 친구들이란 애들은 영희를 찾아와 괴롭히며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다. 아이러니다. 경민을 친구라고 생각지 않던 애들이 죽고 나니 뒤늦게 연민을 느낀 걸까.


경민의 엄마는 영희에게 자꾸만 책임을 묻는다. 그렇다고 경민의 엄마도 죄가 없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일에 빠져 경민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딸이 죽고 나니 밀려오는 죄책감을 영희에게 전가하는 셈이다. 

경민의 엄마는 영희를 집요하게 좇는다

영희는 경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한 뒤 자신 역시 죽기를 시도한다. 말하자면 결백하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지 모른다. 아무리 말해도 학교와 경찰은 듣지 않고, 죄 많은 소녀로 남은 상황에서 죽음으로나마 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영희의 자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죽음을 완성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가 속한 공동체 안으로 휘몰아쳤다. 모두들 제각기 다른 생각과 행동들, 무엇 하나 선명한 것이 없다. 이 영화는 누가 경민을 죽게 만들었는지, 그래서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지 묻는 영화가 아니다. 세상사 많은 일들이 파고 들어가면 어느 하나 명확한 원인과 결과로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복잡성에 대한 영화다. 영희의 소리 없는 마지막 절규가 단순한 판단에 대한 경계로 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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