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역사소설 <남강 위의 먹구름>
“역시나 폐하께서 패하셨구나. 유모는 준비를 하라.”
안방의 상석(上席)에 앉은 촌주 부인이 엄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 부인이 말한 ‘폐하’는 전 웅천주(충청남도) 도독이자 현 장안국(長安國)의 왕인 김헌창이다.
김헌창은 6년 전 이 청주(현 진주시)의 도독으로 부임했었다. 이때 촌주 부부와 연을 맺었다. 그래서 촌주 부부는 김헌창의 거병에 응했었다.
신라의 9주(州) 5소경(小京) 중 4주 3소경이 이렇게 장안국 소속이 됐다. 바다가 코앞인 이 청주의 촌주마저 해산한 며느리를 위해 마른 미역을 구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 정도로 신라 왕실은 차별과 수탈을 해왔다. 신라 왕실과 진골들을 향한 불만이 하늘을 찌를 만했다.
이렇게 건국된 장안국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패망했다.
방 안의 여러 여인들이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촌주 부인의 딸들과 며느리들, 손녀들이었다.
이 와중에도 네 아이들은 각자 자기 엄마의 허벅지를 베고서 자고 있거나 두리번거려댔다.
머리 허연 촌주 부인, 그러니까 시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엄명 때문에 여인들은 자신의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 일이 닥치는 순간까지 모르고 있는 게 나을 것이라는 데 다들 동의했기 때문이다.
“어머님, 저희 석이랑 목이는요? 다른 아이들은요? 정녕 영이만 살려야 하나요?”
셋째 며느리가 항의하듯이 질문했다. 이제껏 시어머니에게 말대구조차 시도해본 적 없던 여인이었다.
촌주 부인은 셋째 며느리가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미란 게 이런 거 아니겠는가. 제 배로 낳은 아이들이 비명횡사를 하게 생긴 판이니까. 더군다나 단 한 달도 안 되어 이 세 모자의 운명이 뒤집혔으니까.
촌주 부인은 셋째 며느리를 일부러 외면하면서 힘겹게 답을 했다. 다른 땐 상상 못한 모습이다.
“어쩔 수가 없다. 세 살 밖에 안 됐고, 여자아이니까 서라벌의 왕도 별 관심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기대한다. 아이들만은 다 살리고 싶다만…, 불가능하지 않느냐!”
촌주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셋째 며느리가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며느리들과 딸들, 손녀들도 뒤따라 울음을 터뜨렸다.
딸들도, 며느리들도 이미 서방들을 혹은 아들들을 잃었다. 서방들과 아들들은 그녀들의 아비/할아비인 촌주를 따라 그녀들의 오라버니들, 서방들과 함께 거병해 청주군(菁州軍)을 조직했다.
청주군은 김헌창의 봉기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굴자군(창원시)을 경계했다. 굴자군에서 동쪽에 있는 금관소경(현 김해시)의 병사들과 연계할 방책도 모색했다. 금관소경 측과 연계한다면 서라벌을 견제할 수 있어서였다. 그랬다면 왕은 군대를 김헌창이 있는 웅천주(충청남도)로 보내지 못했으리라. 선왕(애장왕)을 시해하고 보위에 올라서 왕권이 불안정한 현 왕(헌덕왕)은 청주-금관소경 연합군이 서라벌을 칠 걸 더 우려했을 테니까.
이런 청주군에 장안국왕 김헌창이 ‘어명’을 하달했다. 요충지이자 청주가 관할하는 성산(성주군)으로 올라가서 사벌주의 병력과 연계한 뒤 달구벌(대구)의 신라군을 경계하라고 했다.
사벌주 도독은 김헌창의 편에 섰기에 이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사벌주 도독을 보좌하려고 함께 부임했던 친척 겸 식객 김작진은 달아났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밀양시)으로 달아났듯이 말이다.
어쩌면 지방민들의 봉기가 일어날 경우 이렇게 대응하라고 왕이 사벌주 도독에게도 지시했으리라. 물론 촌주를 비롯한 청주군 수뇌부가 알 바 아니었다.
청주군은 ‘어명’에 따라 북쪽에 있는 성산에 갔고, 사벌주에서 내려온 병력과 힘을 합쳤다.
청주군 수뇌부는 금관소경의 병력이 연계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그러나 굴자군 측이 눈치만 보며 얌전히 있고, 금관소경도 황산강(낙동강) 일대에 나뉘어 주둔한 화랑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휘하의 별동대와 대치하는 걸 알게 됐다. 청주군과 사벌주군이 이찬(伊湌) 균정(均貞) 휘하의 신라군 본대를 깨뜨린다면, 저 별동대도 뒤이어 금관소경군과 연계해 쫓아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 다음에는 서라벌을 노리는 거고. 그리 되면 신라 왕의 심장이 쫄깃해지리라.
“그래,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 가문은 옛 자타국 왕실의 영광을 되찾았을 것이다. 너희들 아버님이신 촌주께서도 그걸 기대하셨기에 웅천주 도독이셨던 폐하께서 거병하셨을 때 호응하신 거고. 지금으로부터 260년 전 마지막 한기(旱岐: 군주)의 모친께서는 신라의 왕에게 자타국을 들어 바치셔야 했단다.”
촌주 부인은 넋두리를 하듯이 말을 토해냈다.
딸들도, 며느리들도, 손녀들도 촌주 부인의 말 같은 건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오직 막내손녀인 영이를 안고 있는 유모만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지막 한기 모자께선 서라벌에서 저 신라 왕실에 의해 의도적으로 방치당하고 병에 걸려 세상을 뜨셨다. 자타국 왕실의 일원이었던 우리 가문의 과거를 이 청주의 도독으로 부임하셨던 폐하께서 들으시고 눈물을 흘려주셨지 않았느냐. 당신 아버님께서도 저 서라벌 놈들의 농간으로 옥좌를 빼앗기시고 저 명주(강릉시)로 쫓겨 가셨다면서 말이다.”
말을 마친 촌주 부인은 방안을 둘러봤다.
다들 비참한 죽음을 앞두고 흐느끼는 가운데 오직 유모만이 촌주 부인을 보고 있었다.
자기가 내려줄 지시를 기다리는 유모한테 촌주 부인은 말했다.
“자네도 수고 많이 했네. 우리 영이를 자네 친딸처럼 소중히 여겨줬고 말이야.”
“쇤네는 그저 마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일 뿐입니다요. 저 새 도독의 농간으로 쇤네의 아비가 물려준 대장간도 잃고 서방도 맞아죽어 쫄딱 굶어 죽게 생겼던 저희 모녀였지요. 그런 저희를 마님께서 구해주셨지 않았습니까요. 비록 쇤네의 딸년은 이 집에 들어오고 얼마 뒤 죽었지만요. 그것도 다 그년 팔자였지만요.”
“그래, 이젠 우리 영이 앞에도 힘든 운명이 놓이겠구먼.”
“어떻게든 쇤네가 힘껏 뚫고 나가 보겠습니다요, 마님. 영이 아씨는 제겐 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반드시 쇤네의 친딸로서 잘 키우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요, 마님.”
“그래, 잘 부탁하네. 부디 우리 영이가 자타국 왕실의 혈통을 잇는 여인이라는 걸 잊지 않도록 가르쳐주게. 자아, 어서 위암(危巖: 의암)으로 가보게. 영이 아범이 패물과 배를 준비해놨을 걸세. 배를 타면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게. 알았는가?"
촌주 부인은 유모한테 엄숙하게 지시했다.
유모도 굳은 표정을 짓고서 진중하게 대답했다.
“네에, 마님. 그럼 저희는 이만….”
이 소동에도 곤이 잠든 영이 아씨를 업고 나가는 유모의 뒤를 젊은 여인의 피 끓는 외침이 쫓아왔다.
“영이야! 영이야! 영이야아아아아아!”
울먹이면서 뛰쳐나가려는 이 막내며느리의 손을 촌주 부인이 억세게 붙잡았다.
“영이만이라도 살리기로 했지 않느냐! 정녕 네 딸도 여기서 죽기를 원하는 게냐?”
시어머니가 통렬히 꾸짖었다.
동서들도 이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 아이들이 어미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 한 채….
막내며느리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촌주 부인은 검게 옻칠 한 함(函)을 열더니 황금 뚜껑이 있는 녹색 유리병 하나와 금으로 만든 잔들을 꺼냈다. 잔의 수는 사람 수와 같았다. 이런 날을 미리 준비했었나 보다.
“자아, 사내들이 마지막 싸움을 부담 없이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자구나. 애들도 험한 일 겪지 않게 해줘야 하고 말이지.”
며느리들과 딸들에게 독약을 채운 금잔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촌주 부인은 떠올렸다.
보름 전 시커멓고 거대하며 눈깔도 사람의 눈 같은 새 한 마리가 청주 태수의 청사(廳事) 남쪽 연못에 나타났었다. 키는 다섯 자(150센티미터)요, 부리는 한 자 다섯 치(45센티미터)에 머리도 다섯 살 아이의 머리만 했다. 다들 요괴가 나타났다며 두려워하며 지켜만 봤다.
어느 노인이 멀리서 보더니 요괴가 아니라 사다새(펠리컨)라고 했다. 완산주(전라북도)나 무진주(전라남도)의 바닷가에서 주로 살며, 물고기나 작은 짐승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그제야 성 안 사람들은 안심했다. 장안국이 승리할 걸 알려주러 온 길조(吉鳥)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 새는 사흘 간 얌전히 있다가 갑자기 죽었다.
촌주 부인은 묻어주라 지시했다.
육고기가 고팠던 백성들이 고기만 취하려고 배를 갈랐다. 굶어 죽었던 것인지 다섯 되짜리 그릇만 한 위장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그 사다새는 우리가 패망하리라고 알려주러 왔던 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