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역사소설 <남강 위의 먹구름>
“허어!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새가 죽은 날이 하필 삼년산성이 함락된 날이었으니까.”
포승줄에 꽁꽁 묶인 촌주는 자기처럼 꽁꽁 묶인 장남에게 힘없이 대답해주고 있었다.
이 부자도 성산에서 패하면서 아들들/아우들을 잃고 성에 들어온 뒤에야 이 사다새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때 촌주는 성산에서 패주할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청주군과 사벌주군이 이찬 균정 휘하의 신라군 본대와 황산강을 사이에 두고서 대치하던 중이었다. 그게 보름 전이었다. 이날 촌주는 사벌주 도독과 함께 비보를 받았다.
전령이 가쁜 숨을 내뱉고 달음박질을 치며 가져온 소식은 삼년군(보은군)에 있는 삼년산성이 함락됐다는 거였다. 신라군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부대가 공격했다는 거다. 지휘관이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인 것까지 확인했다.
장안국의 중심지인 웅천주와 사벌주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삼년산성의 함락 여파는 대단했다. 사벌주 도독이 웅천주로 후퇴한 뒤 단단한 요새인 웅진성에 들어가 농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시발점이었다. 웅천주로부터의 보급과 통신이 끊기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면서....
사벌주군이 웅진으로 간다는 소식이 전 군에 전파되자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성산의 사벌주군과 청주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패했다는 소문이 퍼져서였다. 병사 중엔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 보일 때 자기 마을로 도망가려는 자들도 있었다. 곧 그런 도망병들이 속출했다.
균정과 잡찬(迊飡) 웅원(雄元)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이때 황산강을 건너왔다. 사벌주군과 청주군이 이들을 신경 쓰지 못하는 지경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병력 수마저 월등한 신라군에 사벌주군도 청주군도 도륙을 당했다.
촌주는 아들들, 사위들과 손자들이 뚫어준 혈로(血路)로 장남의 경호만 받으며 도망쳤다.
신라군은 웅천주로 달아나는 사벌주군을 쫓으며 진격하느라 이 부자를 무시했다.
신라군 별동대가 텅 비다시피 한 청주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무려 11개 군(郡)과 27개 현(縣)을 관할하는 청주는 성산에서의 패전 후 10여일 만에 함락됐다.
촌주 부자를 비롯한 포로들의 처형은 성 안의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자타국 시절부터 시장이 열리는 곳이라 많은 백성들이 운집했다.
저항이 불가능하도록 꽁꽁 묵인 채 무릎을 꿇린 포로들은 도부수의 장검에 목이 잘렸다.
이미 독을 먹고 죽은 여인들과 아이들도 광장에 뉘인 채 장검으로 목이 잘렸다.
어떤 병사는 시체의 머리를 창으로 찍어 구멍을 내기도 했다. 그런 짓을 하면서 히죽히죽 웃는 모습은 영락없이 요괴 같았다.
이는 다 청주의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옛 자타국 땅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는 걸 신라 왕실에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동원된 청주 백성들이 시체를 성 밖의 해자로 실어 날랐다.
어른의 시체는 수레로, 아이들의 시체는 지게로 날랐다.
길이 160여 자(48.5미터)에 너비 5자 정도 되는 해자에 시체 20여 구가 차곡차곡 쌓였다.
“젠장! 재수가 없어!”
수레를 끌고 왔던 마부가 짜증을 냈다.
“왜 그래?”
해자에 들어가 시체들을 정리하던 작업자가 물었다.
“재갈이 부서졌지 뭐야.”
“에휴…, 젠장! 억울하게 죽은 이 사람들 원귀(寃鬼)가 붙었을지 몰라! 다 버리자고. 이거 원 찜찜해서…, 도련님들 싣고 왔던 지게도 버려야겠군!”
군관 하나가 작업을 지켜본 뒤 10여 살 어린 지휘관에게 보고했다.
젊은 지휘관은 화랑, 어느 진골 분의 아드님이었다.
그에 비해 군관은 6두품이었다.
“총 스물넷입니다, 나리. 계집이 열하나, 아이가 넷, 나머지는 사내들입니다. 촌주 본인과 장남, 응원하러 왔던 군현의 촌주들과 부하들입니다. 세 살배기 계집아이도 있었다던데, 안 보입니다, 나리.”
“그 아이만 없어졌나?”
화랑은 차갑게 물었다.
“유모도 안 보인답니다.”
군관이 쭈뼛쭈뼛 대답했다.
“흥! 찾느라 고생할 필요 없다! 산에서 호랑이나 표범이 대신 처리해줄 거다. 유모도 제 친자식이 아닌 걸 얼마나 오래 키우겠느냐.”
“예, 그럴 겁니다, 나리.”
군관이 맞장구를 쳤다.
화랑은 듣고 있지 않았다.
화랑은 해자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몸통을 홱 돌려 처소로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