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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1. 2024

- [건담소설] 바다의 침묵

토미노 요시유키의 <모빌슈트 건담>(1979)

* 본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군에 불과 6주만에 항복했던 프랑스에서 내부 저항세력이던 레지스탕스를 위해 활동한 작가 베르코르 선생이 쓰신 단편소설 <바다의 침묵>을 오마쥬한 겁니다. 원래 글은 2009년에 썼네요. 제가 출판사 범우사에서 <바다의 침묵>을 편집하고 몇 년 뒤에요.


*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이름입니다.

뭐,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카이저 소제가 형사 양반 앞에서 하던 걸 흉내 좀 내봤습니다.

https://getyarn.io/yarn-clip/e0f4a648-aee2-4ca5-a338-909e9cb0dcba





우주세기 0079년 1월 10일 오전 7시 41분,

지구연방군 예비역 중사이자 지구연방 코리아 지역 의주시의 순대국밥집 주인장이었던 나, 그리고 내 질녀(조카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시각.

그리고 아마도 내 국밥집의 단골이자 지온군 지구방면군 마젤라어택 전차 부대의 여러 소부대 지휘관들 중 하나였던 마슈마 세로 대위의 인생도.

  지온군이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며 저지른 ‘콜로니(우주식민도시) 투하’는 콜로니 아일랜드 이피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심도시 시드니의 수천만 주민들은 물론, 그 직후에 벌어진 지진과 대해일로 지구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중에는 내 동생 부부와 조카들도 있었다.

내 질녀만 살았다.

신의주를 박살낸 대해일 직후,

동생 부부와 연락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구조작전에 나선 연방군과 피난민들이 내 가게에 올 때마다 무료로 국밥을 말고 탁주를 내주었다.

연방군은 이런 내 ‘공로’를 인정했고, 내가 10여 년간의 현역 시절에도 받지 못한 훈장도 줬다.

게다가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찾기를 포기한 질녀까지 찾아줬다.

다만 “충격으로 인한 실어증입니다”라는 말을 거대한 체구의 여군 소위가 남기고 간 게 못내 아쉬웠다.


 



 

  “연방군이 루움에서 대패했다던데?”


  “레빌 제독, 그 영감도 행방불명이라지? 전살까?”


  “글쎄, 자살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3분의 1 밖에 안 된다던 적을 상대로 그 많은 함대를 다 말아먹었으니.”


  국밥을 먹던 중년의 손님들이 두런두런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TV에서는 계속 콜로니 투하에 따른 지진과 해일의 피해상황만 보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질녀 또한 ‘2차 충격’을 받을 게 우려되어 일부러 꺼뒀다.

전쟁 직후 인터넷도 불통되어 바깥소식을 얻을 방법은 오직 손님들의 대화 내용뿐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인지라 애써 무심해지려 노력했다.

  특히 이 지구에서만이 아니라 우주에서도 벌써 수억 명이 죽었다는, 그리고 연방에 대한 거부 의사를 혹은 지온에 대한 찬성 의사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콜로니들이 핵무기나 생화학무기에 전멸했다는 얘기에는 욕지기가 치솟기까지 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고바야시 상사가 불쑥 들어왔다.

  그의 뒤로 부하 둘이 따라 들어왔다.


  “아, 고바야시 상사! 오늘도 바쁘시구먼.”


  구조작전 때의 인연으로 이 예비역 중사를 깍듯이 선배로 모시는 그가 고마웠다.

더욱이 질녀를 찾는 데 그가 큰 도움을 줬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 뒤엔 더더욱 그러했다.


  “크리스 씨는 어떻습니까, 선배님?”


  “휴―, 그 사건 터진지 20일 밖에 안 됐네. 저 아이가 괜찮다면 기적이지 않겠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2층에서 질녀가 아주 조용히 내려와 내 바로 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니겠나.

마치 콜로니나 우주전함의 외부 작업용 포트가 움직이듯이 말이다.


  “어? 얘야. 좀 더 누워있지 않고. 뭐 좀 먹으련?”


  질녀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고바야시 상사의 도움을 받으며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고바야시 상사를 따라 들어온 두 병사들은 눈치껏 다른 자리에 따로 앉았다.

나는 고바야시 상사가 질녀의 입을 열게 해준다면 둘이 결혼을 전제로 사귀게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바로 그때,


  “쥔장! TV 좀 틀어보시오!”


  군복 차림의 또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서 다짜고짜 TV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가 자기가 직접 틀었다.


  “오늘 남극조약이 체결된다는 판에, 여긴 지금 태평이시구먼!”


  “무슨 소리요, 소위?”


  동시에 무례함까지 책망하는 고바야시 상사의 말투에 TV를 켠 소위가 움찔거렸다.


  “보면 모르겠소이까, 고바야시 상사! 지온 놈들과 휴전을 한다잖아요! 아니, 패배 인정이라고요!”


  소위가 손가락으로 TV화면을 가리켰다.

하지만 화면에는 연방군 제독 차림을 한, 얼굴 전체가 흰 수염으로 덮인, 산타 할배처럼 생긴 둥근 얼굴의 노인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지온에 병사 없다!”


  그 이후의 말은 내 기억에 없다.

 다만 그 노인의 뒤이은 이야기에 그 소위 혼자 기뻐 날뛰었다는 것 밖에는…….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에서




 

 

  두 달 뒤의 새벽,

  고바야시 상사는 텅 빈 식당에서 나 그리고 크리스와 한 테이블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나와 고바야시 상사 앞에는 이미 깨끗하게 비워진 탁주잔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선배님, 홋카이도로 가는 자리가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나도 자네가 크리스를 데려가 준다면야…….”


  하지만 크리스는 내 옆에 찰싹 들러붙어 앉은 채 내 팔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이젠 숫제 이를 악―문 채 얼굴을 내 왼팔 소매에 대고 있었다.


  “크리스, 너라도 살아야 한다. 난 함께 갈 수 없어.”


  하지만 크리스는 고개를 저어댔다.

  고바야시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검어졌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난 고바야시는 조용히 거수경례를 한 뒤 식당을 나갔다.

 그리고 호버트럭의 추진용 팬이 부우웅~하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10시간 뒤, 지온군이 의주에 입성했다.

   대규모의 무력시위가 우리 식당 앞을 지나갔다.

  아니, 자쿵~ 자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려 나가봤더니

단 하나뿐인 번쩍이는 눈깔로 나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인간형 로봇이 서 있었다.

시선을 점점 떨어뜨리니 그 로봇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대포 달린 비행기 같은 포탑이 있고 모가지가 긴 괴상한 전차 세 대가

그 로봇 앞에 멈춰 있었다.

또 그 아래로 시선을 더 내렸더니

호버오토바이 한 대가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호버오토바이의 병사가 단말기로 뭔가를 확인하더니 해드셋에 달린 마이크에 대고 뭐라 지껄였다.

그러자 전차들 중 하나의 포탑 꼭대기에 달린 전차장 자리의 해치가 열리더니, 전차장인 듯한 자가 벌떡   튀어나와 거수경례를  하고서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지온 공국 극동 방면군 소속 마슈마 세로 대위라고 합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저와 제 부하들의 아침식사, 그리고 제가 이 지역에서 머물 숙소를 구하고 싶습니다.”


  지극히 신사적인 말이었지만, 주제는 결국 ‘공출’이었다.

  하지만 나와 질녀를 지켜줘야 할 연방군은 도망갔고,

지금 내 앞의 거대한 로봇은 발길질 한 번으로 내 식당을 박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지휘관인듯한 장교를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이 질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문득 고바야시 상사가 생각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0시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 짧게 깍은 검은 머리에서 윤이 나던 고바야시 상사와 달리, 마슈마 세로 대위의 옅은 파란색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하니 목 아래로까지 내려왔다.

더욱이 군복 상의 왼쪽에는 분홍색 장미까지 꽂고 있었다.

그 장미에 코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이로부터 두 주 뒤에 알게 되었다.


  ‘지온의 장교는 건달인가?’


  그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한데다, 가식적인 것일지는 몰라도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나는 이 사람 하나라면 집에 계속 묵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마슈마 세로 대위는 내 집의 하숙생이 되었다.



마젤라 탑 어택 전차 https://namu.wiki/w/%EB%A7%88%EC%A0%A4%EB%9D%BC%20%EC%96%B4%ED%83%9D

 

호버오토바이 http://gundamcity.co.kr/m/product_detail.html?brand_uid=3830
호버트럭 https://namu.wiki/w/%ED%98%B8%EB%B2%84%ED%8A%B8%EB%9F%AD








  마슈마 세로 대위가 의주와 신의주에서 활동했던 정확히 반년 동안,

나와 질녀 그리고 우리 가게는 겉보기에는 전쟁 전과, 아니 지온군이 코리아 지역을 점령하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쟁 내내 중립을 지켰던 사이드 6의 콜로니들과 달에 건설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 심지어 지온 본국인 사이드 3의 콜로니들에 거주하던 사람들마저 우리와 같은 상황에 있었더랬다.

  다만 사이드 3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던 콜로니 ‘마할’의 주민들은 그들의 도시가 초거대 광선포로 개조되는 바람에 전쟁 중반부터 강제 퇴거를 당했다.

그러니까 마할의 주민들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무리에, 대략 내 질녀 같은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야 했다.

개중에는 퇴거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마할 내에서, 자기들이 태어나고 살아온 바로 그곳에서 독가스로 살해당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자기네 군대의 손에…….

  마슈마가 만약 이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 또한 그렇듯 추악한 짓을 했을까?

  차라리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마슈마의 단점을 꼽으라면 단 1초도 현실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낭만주의자처럼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부하들에 대한 장악력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만약 마슈마가 군인 혹은 ‘조직’과 관련한 직업 대신 예술가의 길을 택했더라면 그는 분명 세상을 좀 더 밝게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부하들에게서마저 ‘장미의 기사’라는 야유를 ― 물론 등 뒤에서, 이를테면 우리 식당 같은 곳에서 ― 받아야 했던 그는 어느덧 피정복민이나 다름없는 나에게마저 동정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됐다.

 그러나 섣부른 동정이 그 수혜자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아 괴물로 만들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슈마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한 나는 항상 침묵을 지켰다.

이는 질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아이는 숫제 나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도와 묵묵히 식당 일을 도울 뿐이었다.


  “이 가게의 TV가 고장이 났다는 게 제 유일한 불만입니다.”


  참으로 새삼스러운 마슈마의 질문에 나는 간신히


 “아, 예―”


라고  대답했다.

하긴 ‘지온 공국군 지구 제압군’인가 하는 자들의 군대식 방송만 나오기 시작하고 다음 날, TV도 침묵했다.

아니, 마감을 한 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봤으니까, 분명 누군가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TV를 수리하거나 새 것으로 교체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이 도시에 거주해온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온군 병사들마저 TV를,   ‘지온 공국군 지구 제압군’의 방송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전자의 생각에 대해서야 굳이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뜻밖이었다.

지온군 병사들마저 자기네 사령부의 발표 내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다니.

  마슈마 또한 이전까지는 TV의 고장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항상 일찍 출근하여 늦게 퇴근하는데다, 종종 여러 날 동안 안 돌아오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대위쯤 되면 TV가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든가, 아니면 통신병이든 정보원이든 앞 다퉈 이런저런 뉴스들을 가져다줬을 테니 굳이 싸구려 음식점에서 TV를 봐야 할 이유는 없으리라.

그래서 마슈마의 질문이 내게는 상당히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아,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이런 집에서 TV와 제가 눈을 마주칠 때마다 TV가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여쭤본 겁니다. 보거나 듣는 사람을 무시한 채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를 다 하는 TV야말로 보통사람들의 평화롭고 평범한 삶의 상징이니까요. 어르신, 그 ‘탁배기’라는 거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아, 예!”


  나는 허둥거리면서, 하지만 질녀는 차분하면서도 느릿느릿하고 조용히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탁주와 순대, 머리고기와 내장 수육, 그리고 야채 몇 가지와 된장.

김치도 내올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지온군이 지구로 강하해온 이래 부족해진 수많은 식품 중에 그것도 포함되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마슈마는 내게 술을 권한 다음, 질녀에게도 한 잔 권하려 했다.

  하지만 침묵 그리고 그 어떤 감정도 보여주지 않는 눈으로 질녀는 거절을 표했다.

  손수 자신의 잔을 채운 마슈마는 마치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집으로 가다가 잠시 들린 노동자처럼 탁주잔을 시원스레 비웠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주 긴 얘기를 끄집어냈다.

 






 

  “저희 어머니의 가문은 고(故) 지온 줌 다이쿤  님께서 아직 지구에 계실 때에도 사이드 3의 명망 높고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늘 'TV란 서민들의 오락도구이자 엘리트들이 서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 책과 음악을 가까이 하면서 지식과 지혜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을 얻으라' 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책을 읽고 또 읽어 나가면서 책이란 것도 결국 글을 쓴 이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장을 담은 그릇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오직 평화로운 마음을 구하기 위해 더더욱 음악에 열중했습니다.”


  마슈마는 내가 손 쓸 새도 없이 또 한 번 자작을 한 다음, 그 잔도 곧 비웠다.


  “하만 칸 소령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지요. 제게 이 장미를 주신 하만 누님께 제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그랬었지요. 지구에 있을 때부터 대대로 군인 가문이었던 집안의 일원인 하만 누님은 그녀 자신을, 그리고 저를 사관학교로 이끄셨지요.

하지만 그녀의 참모습은 전 인류가 어머니인 지구의 품을 떠나 우주로, 또 다른 세상으로 살 길을 찾아나아가야 한다는, 말 그대로 독립하여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지온 줌 다이쿤 님의 사상의 신봉자이셨던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중력에 발목 잡힌 채 지구에서 아등바등 사시는 여러분들은 지온 줌 다이쿤 님을 정신병자로 치부하셨습니다. 연방의 엘리트들도 지구에서 우주로 정치 활동의 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120억 인류를 우주로 인도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우주를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인류의 진정한 지도자감이셨던 그분을 그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연방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여러 콜로니들과 월면도시들에서 착취하고 움켜 쥔 이익을 자기 같은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았기에 못 마땅해 하는 꼴통 정도로 이미지 조작을 해서 연방의 서민들한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지온이 떨쳐 일어나 ‘정의의 검’을 지구에 꽂고, ‘정의의 철퇴’로 일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120억 인류가 동족상잔의 비극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이유인 것입니다! 아니, 저는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나 또한 질녀 옆에서 얌전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마슈마는 또 자작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하지만 저의 이런 순진한 생각을 누님은 겨우 다섯 시간 전에 뭉개주셨지요.

  누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온 줌 다이쿤 님이 세상을 뜨시면서 그의 이상도 죽었다고 말이지요.

  지온 줌 다이쿤 님의 이상을 이어받았다는, 아니 그분의 이상을 따르며 완성시키겠다고 외친, 그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자처한 데긴 소도 자비 공왕과, 그분의 장남이신 기렌 자비 총수님은 이제 겨우 수십억 명으로 줄어든 인류를, 여러분들처럼 이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그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을 극소수의 엘리트들이, 말 그대로 ‘우성 인류’가 지배해야 한다는 ‘꿈’을 갖고 있다고 말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지온 줌 다이쿤 님의 이상은 변질되었습니다.

  하긴 고대의 모든 이상주의자들의 신념은 그 후계자들에 의해 늘 변질되었지요.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임을 자처한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은 어떠했으며, 미국의 독립을 이끈 저 위대한 공화주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완성한, 그래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가장 열심히 펼쳐나갈 것이라고 페인과 약속한 미국의 엘리트들은 어떠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만 누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저는 음악을 계속 전공하지 않은 제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슈마는 한 번 더 자작을 하더니 자신의 결심을 털어놨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제 부하들과 함께 ‘팻 엉클’ 수송기 편으로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로 전출될 겁니다. 희소자원을 채굴하는 기지의 사령관이라는 마 쿠베 소령의 밑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유럽방면군 사령관인 유리 켈라네 소장 밑으로 들어갈지는 아마도 출발 직전에 신의주 기지에서 듣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와 제 부하들이 장차 시커멓게 타버려 미라가 되어가는 시체를 품에 안은 채 인류의 미래를 지켜볼 광야로 보내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주 잠깐, 질녀의 표정이 변한 것 같았다.

  아마도 내 몸안을 돌던 취기 때문이었을까?

  혹시 마슈마도 질녀가 동요하는 걸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침묵을 깨기 전에 마슈마는 이미 벌떡 일어나 있었다.


  “안녕히 주무십시요.”


 마슈마는 질녀를 몇 초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팻 엉클 수송기 https://namu.wiki/w/%ED%8C%BB%20%EC%97%89%ED%81%B4





 

 

  전차와 로봇 그리고 부하들은 먼저 갔는지, 식당 밖에서 마슈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호버트럭이었다. 지온군의 표식을 단 연방군의 호버트럭.

  그 호버트럭이 그가 타고 왔던 그 괴악한 모양의 전차를 대신하여 그가 타고 떠나야 할 교통수단인 것이다.


  “무사히 귀향하시오. 사이드 3로.”


  내가 해줄 수 있었던 최대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질녀의 얼굴만 바라보던 마슈마는 그녀의 축복을 받지 못하자 침통한 표정을 짓고 돌아서려 했다.  마치 예전에 고바야시 상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순간 내 귀에도 들렸다!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속삭이는 질녀의 목소리가...!

그리고 마슈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슈마는 함박 미소 지으며 호버트럭에 탑승했다.

  마슈마가 호버트럭의 입구 밖으로 상반신을 내민 채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것을 우리 둘은 끝까지 봤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고바야시 상사가 돌아왔고,

그로부터 또 한 달쯤 뒤에 전쟁이 끝났다.





코바야시 하야토 <기동전사 퍼스트/Z/ZZ 건담>


크리스 매켄지 <건담 주머니 속의 전쟁>


마슈마 세로 <기동전사 ZZ 건담>


하만 칸 <기동전사 Z/ZZ 건담>


레빌 제독 <기동전사 건담>


취사반장 아조씨 <기동전사 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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