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군에 불과 6주만에 항복했던 프랑스에서 내부 저항세력이던 레지스탕스를 위해 활동한 작가 베르코르 선생이 쓰신 단편소설 <바다의 침묵>을 오마쥬한 겁니다. 원래 글은 2009년에 썼네요. 제가 출판사 범우사에서 <바다의 침묵>을 편집하고 몇 년 뒤에요.
나와 질녀 그리고 우리 가게는 겉보기에는 전쟁 전과, 아니 지온군이 코리아 지역을 점령하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쟁 내내 중립을 지켰던 사이드 6의 콜로니들과 달에 건설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 심지어 지온 본국인 사이드 3의 콜로니들에 거주하던 사람들마저 우리와 같은 상황에 있었더랬다.
다만 사이드 3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던 콜로니 ‘마할’의 주민들은 그들의 도시가 초거대 광선포로 개조되는 바람에 전쟁 중반부터 강제 퇴거를 당했다.
그러니까 마할의 주민들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무리에, 대략 내 질녀 같은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야 했다.
개중에는 퇴거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마할 내에서, 자기들이 태어나고 살아온 바로 그곳에서 독가스로 살해당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자기네 군대의 손에…….
마슈마가 만약 이곳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 또한 그렇듯 추악한 짓을 했을까?
차라리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마슈마의 단점을 꼽으라면 단 1초도 현실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낭만주의자처럼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부하들에 대한 장악력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만약 마슈마가 군인 혹은 ‘조직’과 관련한 직업 대신 예술가의 길을 택했더라면 그는 분명 세상을 좀 더 밝게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부하들에게서마저 ‘장미의 기사’라는 야유를 ― 물론 등 뒤에서, 이를테면 우리 식당 같은 곳에서 ― 받아야 했던 그는 어느덧 피정복민이나 다름없는 나에게마저 동정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됐다.
그러나 섣부른 동정이 그 수혜자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아 괴물로 만들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슈마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한 나는 항상 침묵을 지켰다.
이는 질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아이는 숫제 나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도와 묵묵히 식당 일을 도울 뿐이었다.
“이 가게의 TV가 고장이 났다는 게 제 유일한 불만입니다.”
참으로 새삼스러운 마슈마의 질문에 나는 간신히
“아, 예―”
라고 대답했다.
하긴 ‘지온 공국군 지구 제압군’인가 하는 자들의 군대식 방송만 나오기 시작하고 다음 날, TV도 침묵했다.
아니, 마감을 한 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봤으니까, 분명 누군가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TV를 수리하거나 새 것으로 교체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이 도시에 거주해온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온군 병사들마저 TV를, ‘지온 공국군 지구 제압군’의 방송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전자의 생각에 대해서야 굳이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뜻밖이었다.
지온군 병사들마저 자기네 사령부의 발표 내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다니.
마슈마 또한 이전까지는 TV의 고장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항상 일찍 출근하여 늦게 퇴근하는데다, 종종 여러 날 동안 안 돌아오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대위쯤 되면 TV가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든가, 아니면 통신병이든 정보원이든 앞 다퉈 이런저런 뉴스들을 가져다줬을 테니 굳이 싸구려 음식점에서 TV를 봐야 할 이유는 없으리라.
그래서 마슈마의 질문이 내게는 상당히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아,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이런 집에서 TV와 제가 눈을 마주칠 때마다 TV가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여쭤본 겁니다. 보거나 듣는 사람을 무시한 채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를 다 하는 TV야말로 보통사람들의 평화롭고 평범한 삶의 상징이니까요. 어르신, 그 ‘탁배기’라는 거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아, 예!”
나는 허둥거리면서, 하지만 질녀는 차분하면서도 느릿느릿하고 조용히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탁주와 순대, 머리고기와 내장 수육, 그리고 야채 몇 가지와 된장.
김치도 내올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지온군이 지구로 강하해온 이래 부족해진 수많은 식품 중에 그것도 포함되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마슈마는 내게 술을 권한 다음, 질녀에게도 한 잔 권하려 했다.
하지만 침묵 그리고 그 어떤 감정도 보여주지 않는 눈으로 질녀는 거절을 표했다.
손수 자신의 잔을 채운 마슈마는 마치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집으로 가다가 잠시 들린 노동자처럼 탁주잔을 시원스레 비웠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주 긴 얘기를 끄집어냈다.
“저희 어머니의 가문은 고(故) 지온 줌 다이쿤 님께서 아직 지구에 계실 때에도 사이드 3의 명망 높고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늘 'TV란 서민들의 오락도구이자 엘리트들이 서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 책과 음악을 가까이 하면서 지식과 지혜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을 얻으라' 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책을 읽고 또 읽어 나가면서 책이란 것도 결국 글을 쓴 이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장을 담은 그릇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오직 평화로운 마음을 구하기 위해 더더욱 음악에 열중했습니다.”
마슈마는 내가 손 쓸 새도 없이 또 한 번 자작을 한 다음, 그 잔도 곧 비웠다.
“하만 칸 소령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지요. 제게 이 장미를 주신 하만 누님께 제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그랬었지요. 지구에 있을 때부터 대대로 군인 가문이었던 집안의 일원인 하만 누님은 그녀 자신을, 그리고 저를 사관학교로 이끄셨지요.
하지만 그녀의 참모습은 전 인류가 어머니인 지구의 품을 떠나 우주로, 또 다른 세상으로 살 길을 찾아나아가야 한다는, 말 그대로 독립하여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지온 줌 다이쿤 님의 사상의 신봉자이셨던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중력에 발목 잡힌 채 지구에서 아등바등 사시는 여러분들은 지온 줌 다이쿤 님을 정신병자로 치부하셨습니다. 연방의 엘리트들도 지구에서 우주로 정치 활동의 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120억 인류를 우주로 인도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우주를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인류의 진정한 지도자감이셨던 그분을 그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연방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여러 콜로니들과 월면도시들에서 착취하고 움켜 쥔 이익을 자기 같은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았기에 못 마땅해 하는 꼴통 정도로 이미지 조작을 해서 연방의 서민들한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지온이 떨쳐 일어나 ‘정의의 검’을 지구에 꽂고, ‘정의의 철퇴’로 일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120억 인류가 동족상잔의 비극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이유인 것입니다! 아니, 저는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나 또한 질녀 옆에서 얌전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마슈마는 또 자작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하지만 저의 이런 순진한 생각을 누님은 겨우 다섯 시간 전에 뭉개주셨지요.
누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온 줌 다이쿤 님이 세상을 뜨시면서 그의 이상도 죽었다고 말이지요.
지온 줌 다이쿤 님의 이상을 이어받았다는, 아니 그분의 이상을 따르며 완성시키겠다고 외친, 그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자처한 데긴 소도 자비 공왕과, 그분의 장남이신 기렌 자비 총수님은 이제 겨우 수십억 명으로 줄어든 인류를, 여러분들처럼 이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그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을 극소수의 엘리트들이, 말 그대로 ‘우성 인류’가 지배해야 한다는 ‘꿈’을 갖고 있다고 말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지온 줌 다이쿤 님의 이상은 변질되었습니다.
하긴 고대의 모든 이상주의자들의 신념은 그 후계자들에 의해 늘 변질되었지요.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임을 자처한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은 어떠했으며, 미국의 독립을 이끈 저 위대한 공화주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완성한, 그래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가장 열심히 펼쳐나갈 것이라고 페인과 약속한 미국의 엘리트들은 어떠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만 누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저는 음악을 계속 전공하지 않은 제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슈마는 한 번 더 자작을 하더니 자신의 결심을 털어놨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제 부하들과 함께 ‘팻 엉클’ 수송기 편으로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로 전출될 겁니다. 희소자원을 채굴하는 기지의 사령관이라는 마 쿠베 소령의 밑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유럽방면군 사령관인 유리 켈라네 소장 밑으로 들어갈지는 아마도 출발 직전에 신의주 기지에서 듣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와 제 부하들이 장차 시커멓게 타버려 미라가 되어가는 시체를 품에 안은 채 인류의 미래를 지켜볼 광야로 보내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주 잠깐, 질녀의 표정이 변한 것 같았다.
아마도 내 몸안을 돌던 취기 때문이었을까?
혹시 마슈마도 질녀가 동요하는 걸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침묵을 깨기 전에 마슈마는 이미 벌떡 일어나 있었다.
“안녕히 주무십시요.”
마슈마는 질녀를 몇 초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