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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 May 29. 2024

사막 속 레몬나무와 호박

삭막한 이곳 구석 어딘가에서 만난 친구들

 오늘 학교에서 레몬나무랑 호박을 심었다. 우리 학교에선 생태활동도우미에 지원하면 반려식물을 키울 수 있는데, 나랑 내 친구는 원래 귤나무와 호박을 반려식물로 골랐다. 호박은 맛도 맛이지만 예쁜 꽃도 보고 싶다는 내 선택이었고, 귤나무는 맛있는 것도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친구의 바램이었다. 그런데 귤나무는 귤이 열리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하여 레몬나무로 바뀌었다.


“레몬이랑 호박이라니.. 나도 블루베리랑 딸기 같은 거 먹고 싶다고.. “

“미안해.. 근데 레몬이랑 호박도 나쁘지 않아..”


 친구가 레몬과 호박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했는데, 오늘 정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식물을 심는 친구를 보고 내심 놀랐다.


친구 왈,

“(-)야, 레몬나무가 호박 햇빛을 가리니까 호박 이리로 옮겨서 다시 심는 거 어때? “

“조금만 더 옆으로 다시 해볼까?”

“아냐 흙은 꾹꾹 누르는 거 아니고 두꺼비 집 다듬듯이 살살해주는 거야. “


 다 심고 물까지 주어 촉촉해진 애들을 소중하게 쓰다듬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구나. 이름도 지어줬다.


친구가,

“저 호박은 이러쿵저러쿵해서 이름 뀨로 하자.”


…?

이런 이름이 오히려 더 좋다나 뭐라나.. 그래도 나름 의미가 있으니..


 나는 자연스럽게 레몬 두 아이의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둘인만큼, 뭔가 사랑이 떠오르는 이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흔한 이름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래서 난 결국 둘 중 꽃봉오리가 맺힌 아이의 이름을 릴리, 열매가 맺히려는 아이의 이름은 세브로 정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이야기, 해리포터에서 사랑 서사의 꽃은 바로 세브랑 릴리다. 친구는 이름이 예쁘다고 허락해 주었다.

누가 누구게?


 집중탐구 시작일인 오늘은 하루종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나와 팀인 내 친구는 균 배양을 해야 해서 집중탐구 기간 전에도 실험실에서 사전 교육을 받았는데, 실험실에 들어가면 혼나지 않고 나온 적이 없었다. 마치 아무런 지식도 받지 못한 채 처음 보는 광장의 한복판에 잘 살아남으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내동쟁이 처진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실전인 오늘 급함과 긴장감의 최고치를 찍었다. 오늘 나눈 대화중 제일 어이없었던 대화다.


“저 선생님.. 그래서 이게 분쇄기인가요..? “

“맞어, 근데 너희 이거로 뭐 분쇄할 건데? “

“저희 소나무 나뭇가지랑 잎 추출물이요.”

“이거 세포 분쇄용인데?”


 아무리 기자재에 대해 찾아보고 계획을 세워왔어도 이런 사전지식의 한계가 있었다. 우리 생각대로 잘 진행되는 것 하나 찾기 힘들었다. 너덜너덜해진 채 친구와 실험실을 나와 기진맥진하고 있었는데, 식물 심으러 오라는 문자가 왔고 그렇게 레몬나무 둘과 호박과의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치 갑갑하고 혼란스러운 이곳에서 숨 쉴 구멍을 하나 찾은 느낌이었다. 삭막한 이곳 구석 어딘가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자리 잡게 되다니! 철저히 자기 이익만을 따져 행동하는, 베푼 호의에 대한 대가로 더 큰 호의를 요구하는, 상대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어 보이는 이들과 함께하는 이 삭막한 곳에서 이렇게 새롭고 설레는 인연이 싹튼다. 참 기쁜 일이다. 소중하고 예쁜 반려식물들을 앞으로 함께 키울 내 친구에게도 늘 고마움을 느낀다. 순수한 정이라곤 찾기 힘든 곳에서 변함없이 함께 웃어주는 친구니까. 내일도 함께 힘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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