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라 그런지 비가 자주 온다. 나 같은 덜렁이가 매우 싫어하는 날들의 연속이다. 매일 아침 “우산 늘 챙기고 다녀-!”라는 말을 애써 귀 속에 집어넣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고 한참이 지나 머리에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질 때즈음에야 한심한 나 자신을 향해 한숨을 쉬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 이 날엔 가방에 우산을 고이 모셔온 날이었다. 밤에 학원이 끝나고 친구랑 지하철역까지 같이 걸어가려는데, 비가 거세게 내리치고 있었다. 쿠르릉, 하는 천둥소리보다 더 무서운 친구의 한 마디.
- 헉, 나 우산 없는데..
평소라면 기겁했겠지만, 다행히 오늘은 내가 우산을 들고 왔다 이거야~ 하며 가방을 보니 우산이 없다. 뭐지. 분명 들고 왔는데.. 하며 천천히 생각해 보니 근처 물리학원 우산꽃이에 우산을 꽃아 두고 온 것이었다. 역시 오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덜렁이다. 다행히 그 학원은 여기와 가깝고, 지하철역 가는 방향이니까 친구에게 같이 뛰어가서 우산을 쓰고 가자 했더니 친구가 주저주저한다. 결국 내가 혼자 뛰어가서 우산을 가지고 다시 친구에게 왔다. 친구가 미안해하길래 괜찮다고 했다. 나는 친수성이고, 너는 소수성이니까, 뭐 이 정도는 이해해 줄게.
나는 물을 진짜 좋아한다. 물론 비 맞는 것까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를 맞는 것이 그렇게 싫은 것도 아니다. 다만 비를 쫄딱 맞은 내 꼴이 너무 웃겨서 웃음만 나왔다. 친구도 피식피식 웃는다. 바지는 다 젖어서 무거워지고, 신발도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걸을 때마다 뿝 뿝 하고 물이 눌리는 웃긴 소리가 난다. 찝찝하고 후덥지근한 이 상황이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마 내 옆에서 같이 뿝뿝거리며 걷고 있는 사람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닮은 점이 너무나도 많다.
물건을 깜박하고 늘 덜렁대는 점, 둘만 있을 때는 큰 소리로 떠들다가도 교무실 앞에만 서면 너 먼저 들어가라고 서로 밀치는 점, 먹기 좋아하는 점, 마음이 여린 점, 영화 보다가 같은 장면에서 울음이 터지는 점, 서로 자존심 내세우며 울지 않은 척하는 점,.. 내가 친구랑 너무 잘 맞고 취향이 다 같아서 이렇게 가족 같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친한 지인분께 자랑했더니, 지인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그 무수한 공통점들 중 다른 점 하나가 둘의 관계를 더 특별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거야.
처음엔 무슨 뜻인가 알듯 모를 듯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알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나와는 다른 상대의 경험, 가치관, 생각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한발 다가가지 않았나. 상대와 가까워질수록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지만, 그와 동시에 신뢰 또한 더욱 커진다.
이과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중 이런 논리도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불변은 없다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뢰도 불변하지 않는 신뢰일까. 언젠가 깨질 신뢰, 관계일지라도 지금의 나는 이 신뢰가 불변일 것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