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의 뿌리를 찾는 여행
부평초는 물 위에 떠있는 풀이다. 개구리가 많이 사는 논이나, 물이 고여 있는 연못에서 흔히 보인다. 땅에 뿌리를 두지 않는 부유성 식물이라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이리저리 쏠려 다닌다.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일컬어 부평초 같은 인생이라고도 한다. 가수 현철님의 “내 마음 별과 같이” 노래 가사의 첫 구절이다. 허전했던 내 마음을 어찌 이리 잘 표현했는지.
“산 너울에 두둥실 홀로 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부평초 같은 마음을”
어려서부터 나야말로 부평초 같은 인생이었다. 딱히 마음 둘 거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살았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도 찾아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아는 아니었다. 어려서는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새어머니와 고모들이 있었지만, 친척 C의 탐욕 때문에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가족이 모두 흩어져 마음 둘 거처가 없어졌다. 고향에는 친척집도 있었으나 딱히 마음 둘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서 지방 발령을 받았을 때는, 지점장이 숙직실에서 거주하도록 방을 마련해 주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내 방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는 아파트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월세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혼자 사는 방에 내 마음이 온전히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 본사로 올라온 지 2년 만에 북가좌동에 방 2칸짜리 전세를 얻어 결혼을 했다. 집이 있고 아내가 있으니, 이제야 내 마음을 둘 안정된 가정이 생겼다. 그 이후에는 어디로 이사를 해도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은 내 마음이 머무는 안식처가 되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것일까. 그사이에 아버지와 영영 이별을 했다. 막상 아버지가 멀리 떠나고 나니, 마음을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 홀로 남았다는 허전함과 함께 다음은 내 차례라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묘한 불안감이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어느새 꺾어진 길 중반에 들어섰다. 그냥 쏜살같이 지나가는 게 인생인가...... 이때부터 내 존재의 뿌리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족보·조상묘지·대종중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 존재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인터넷과 유튜브를 검색했다. 고대 최 씨의 기원은 크게 2가지 설이 있다. 중국 산동의 청하 최 씨와 연관이 있거나, 신라 6 성씨 중 소벌도리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우리 가족의 족보에는 고려시대 문열공 최순작(?~1108년)이 시조다. 중시조인 8 세손 평도공 최유경(1343~1413), 9 세손 경절공 최사강, 10 세손 봉례공 최승령 할아버지가 나의 조상이다. 최초의 기원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에서라도 다소 평안함이 들었다.
경기도 용인시 공세동에 있는 평도공 최유경 할아버지의 묘역을 찾았다. 제일 높은 곳 상단에 평도공 최유경 그 아래에 아들 경절공 최사강 할아버지의 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610여 년 된 묘역이었다. 조상님을 뵙고 먼저 절을 올렸다. 사진을 찍고 비석에 쓰여 있는 비문을 읽어보고 주변을 서성이며 여기저기 한참을 둘러보았다.
조상님이 도우셨던 것일까. 산 아래쪽에 작은 트럭이 하나 있기에 명함을 꽂아놓고 집으로 향하는데 전화가 왔다. 그분을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시제 날이었고 종인들은 약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매년 같은 날에 시제를 지낸다고 했다.
이듬해부터는 제시간에 참석했고, 시제가 끝나면 종인들과 함께 식사도 했다. 종인들이라면 모두 비슷하게 닮은 줄 알았다. 어쩌면 나와 닮은 사람들이 있기를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는 6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다양한 유전자가 섞였다는 의미다. 내가 28 세손이니 시조로부터 27번의 결혼을 통해 현재의 내 모습을 물려받은 것이다.
평도공 시제 참석 후부터는 대종중에서 문중 관련 우편물이 종종 왔다. 대종중 회장님의 인사 글과 함께 각종 행사와 추진 내용들이었다. 우리나라에 종인들이 40만 명이라고 한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종인들과 혈육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고, 코로나19로 3년간 행사가 중단되었다. 다행히 올해는 효렴사 봄철 춘향제가 열렸다. 이 날은 종인 150여 명이 참석하신 듯했다. 행사가 끝나고 식사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주변 종인들과 대화를 했다. 앞에 앉으신 종인은 연세가 많아 보였지만, 항렬이 아래라서 나에게 아저씨라고 부르기에 좀 어색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나를 ○톡 단톡방에 초대를 했다. 가입한 평도공 종인들이 280여 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대종중 행사에 참여하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아마도 서로 비슷한 생각들을 하기 마련인 듯싶다.
단톡방에 나를 소개하는 간략한 글을 올렸다. 경절공 봉례공파 28 세손이고, 고향·선산·학력·직업·업무·관련기관·저서 등을 적었다. 그동안 아는 이가 없어서 서먹서먹했었는데 단톡방에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항렬 한 분에게서 개별적으로 ○톡도 왔다. 종중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시는 분 같았다.
단톡방에서 뜨거운 주제는 “골프장 건설”이었다. 종중산에 수익사업인 골프장 건설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오래전부터 추진하던 일이었지만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다. 계약 당사자와 추진 주체에 대한 전문성·적합성·투명성·경제성 등이 뒤섞인 논의의 연속이었다. 충분한 소통을 통해서 화합하고, 집단지성이 발휘되어 최적의 결론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집에서 족보를 꺼내 다시 보며 나의 뿌리를 생각한다. 고려시대 문열공 최순작을 시조로 모시는 나는, 뼈대 있는 전주최 씨 가문의 28 세손이다.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던 불안감이 이제는 사라졌다. 종인들과 연결된 단톡방을 들여다보면 헛헛한 마음도 없어진다. 든든하고 안정된 마음인지라 내심 천년의 자긍심도 느껴진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