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대한 3가지 질문과 대답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근본적으로는 생존과 번영, 정치와 사회, 신화와 종교, 경제와 무역, 기술과 혁신, 문화와 예술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광범위한 요소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왔다.
이 중에서 종교를 빼고 인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종교는 인간이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삶에 대한 위험과 불안감을 완화시키고, 인간에게 사후에 닥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대답을 제공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인간의 역사에 중요한 일부분이다.
1987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병환 중에 있을 때 정의채 신부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궁금증 24가지를 물었는데, 철학자인 김용규 작가의 답변이 주간조선 홈페이지에 공개되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철학과 인문학으로 풀어낸 답변이다. 이를 참고로 가장 궁금했던 것 3가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다툼·고통·불행·죽음을 주었는가?”
“왜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가?”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금한 질문이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면 더욱 절박한 질문이다. 대답은 분명하게 “존재한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을 닮은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신이 인간을 닮은 모습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 근본 뿌리는, 그리스 신들의 왕 제우스를 기독교의 신 야훼와 동일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회적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그 어떤 형체도 없다고 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이 근원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우주와 세상만물의 형체를 가능케 하는 존재, 즉 창조의 근원을 신이라고 한다. 참고로 성경에는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듯 인간을 닮은 신이 세상만물을 정성껏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신의 손길을 이해하기는 쉽겠지만 안타깝게도 신은 그 어떤 형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달리 생각해보면 신은 지구상에 인간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었는데, 나중에서야 우리 인간들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신의 존재여부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 신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으면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인간 개개인의 믿음에 따라 존재 유무를 달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부부간의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사랑은 존재하지만 고유의 형체가 없어서 증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아내도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이 부부에게는 사랑이 존재한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 모두가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으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부부의 믿음에 따라 사랑의 존재 유무가 바뀌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존재를 믿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믿으면 그 가정은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훨씬 행복해 진다. 하지만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을수록 사랑은 쪼그라들고 삶은 불행하고 초라해질 뿐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신을 믿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억만장자이고 부귀영화를 다 누리더라도 정신적 공허함에 시달린다. 이병철 회장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신에 대해서 물어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으면 신이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선하게 이끌 것이라서, 이 세상은 신의 은총으로 가득하고 우리의 삶에 감사함과 행복이 늘어난다. 또한 사후세계를 믿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훨씬 줄어들고 기꺼이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궁금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는 인간이 왜 다툼·고통·불행·죽음을 겪게 하는가. 이러한 악들을 인간에게 주었으면서 과연 신이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세상의 모든 악은 신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악은 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신은 자연에게 ‘자연법칙’을 주었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으므로, 세상의 모든 악은 자연의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다고 한다. 자연법칙과 자유의지가 우발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됨으로써 악을 발생시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악에 대해 모든 원인과 책임은 자연과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신이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만들 때, 우발적이고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만들었다면 악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악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불안전한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신이 자연과 인간에게 왜 주었느냐는 반론이다. 합리적인 반론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자연과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었더라면 악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악은 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악이 생겨나는 게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악은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참으로 난감한 이야기다. 인간에게 악이 필요하다니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해보자. ‘인간이 바라는 대로 이 세상의 모든 악이 없어진다면 인간의 삶은 어떨까?’ 자연이나 인간으로부터 발생하는 그 어떠한 다툼·고통·불행·죽음도 없는 세상. 모든 것이 풍부하고 아무런 위험도 없어서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는 영원히 평안한 세상 말이다. 그러면 인간은 이러한 지상낙원인 유토피아에서 마냥 행복할까?
이러한 세상에서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의도·목표·계획·용기·도전이 없다. 이에 따른 성실·노력·성취·성공·만족도 없다. 유토피아적인 생활은 잠깐 동안은 행복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정처 없이 그냥 흘러가는 삶일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관대함·친절함·용서·배려·사랑 등과 같은 도덕·윤리 개념도 없다. 편안하기만 한 삶은 결국 우리 인간의 마음을 이끼 끼고 녹슬게 하여 아무런 의미·가치도 없게 만들 것이다. 아무런 위험도 없는 이러한 삶은 먹이가 풍족한 곳에서 사는 동물들의 생활과 무엇이 다를까. 이것이 과연 인간에 대한 신의 뜻일까?
여기서 우리는 판단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악이 없는 세상과 악이 있는 세상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의 뜻에 적합한 것일까? 신의 뜻은 ‘악이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 고난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온갖 다툼·고통·불행·좌절·죽음 등을 원동력으로 삼아, 삶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달으며 삶을 영위하는 것이 신의 뜻에 더 적합하다는 뜻이다.
악에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으니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그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나에게 닥친 악에 대해서 깊으신 뜻을 갖은 신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극복해 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쩌면 신의 깊으신 뜻은, 인간 개개인의 신앙심을 판단하는 도구로써 악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질문의 어순을 좀 다르게 바꾸면, 종교가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이다. 종교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종교가 하는 일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가치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성도들이 ‘자기중심’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곳이다. 자기중심이라는 것은 교만한 이기주의와 연결되고, 하나님중심이라는 것은 겸손한 이타주의와 연결된다. 이를 대입해 설명하면 교회는 성도들에게 교만한 이기주의적 삶을 버리고, 겸손한 이타주의적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는 일은 신앙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성도들이 자기중심적인 교만한 이기주의적 삶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번민에서 벗어나, 가치를 쫒아서 사는 가치중심적 삶 즉 신을 중심으로 한 겸손한 이타주의적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토록 자기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중심과 겸손함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자본주의와 종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투자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서로가 경쟁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고, 승자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패자는 부를 잃어 부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국민들에게 불만과 갈등을 일으킨다. 안정된 법질서가 침해되고 범죄가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사회적 불안요소로 작용하므로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평등은 가능한 한 사회적으로 원만하게 해소되어야 한다.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사회적 불평등을 원만하게 해소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정치적으로 불평등을 줄이는 복지국가를 이룩하거나, 사회적으로 종교를 포용하여 불만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방법이다.
세계적으로 복지가 잘 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사회적 불만과 갈등이 적고 미래에 대해 불안감도 적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과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 국가들처럼 모든 나라들이 복지수준을 높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복지국가와 더불어 종교를 포용하기도 한다. 종교생활을 통한 신 중심적 삶은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어느 정도 잠재운다. 종교의 사회적인 역할이 그러하다.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허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와 종교는 서로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신이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선하게 이끌 것을 믿고 삶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달으며 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발생하는 온갖 불평등·불만·갈등을 초월해야 한다. 하루하루를 신을 중심으로 한 삶과 겸손한 이타주의적인 삶을 추구하며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진정한 평안이 가능한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기중심적인 삶과 신 중심적인 삶,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선과 악이 모두 공존한다. 어느 쪽이든 삶 속에서 무엇이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가져다주는가에 따라서 개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개개인의 선택은 각기 다르다. 일직선을 그려 놓고 한쪽에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다른 한쪽에는 종교적인 삶을 대척점에 놓았을 때, 나의 선택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그 사이에 수많은 지점들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삶이다.
그 위치도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새로운 선택에 따라서 변한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 어찌 변화의 굴곡이 없을까. 어느 한 쪽을 버리고 다른 쪽을 얻어야 한다면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사노라면 굴곡진 환경에 따라서 그 위치를 이쪽저쪽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어제 어디에 있었고 오늘은 어느 위치에 머물러 있고, 내일은 어떤 위치에서 진정한 평안을 얻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