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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Aug 22. 2020

아끼다 똥 된다

이제, 나를 그만 아껴야 한다.

아침에 시작한 청소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중간에 맥주도 마시고, 이 지저분한 곳에서 라면도 먹고.... 고작 3평도 안 되는 방 하나 치우는데 이 정도 속도라면, 일주일 안에도 치우는 것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느린 건 알았지만 오늘 난, 정말 거북이가 따로 없다.      


내방 청소는 몇 달 전부터 계속 숙제처럼 남아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청소도 안 하고 살았냐고? 에이, 설마... 간단히 쓸고 닦는 건 했다. 다만, 그저 쓸고 닦는 것에 그칠 . 내 방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매번 청소를 하면 쓰레기 봉지가 꽤 많이 나가는데... 왜 내방은 매번 똑같을까? 그중에서 특히, 가로 세로 1m가 안 되는 보통 규격의 책상은 정리를 해도 해도 항상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체 왜 그리 물건들이 많은지 원... 예전 직장생활을 할 때도 나의 책상은 비슷했다. 나의 사수는 말했다      


- 넌 왜 책상을 1/3만 쓰는 거냐?      


참... 긴 시간, 내 책상이 정리되지 않는 것처럼 내 인생도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책상을 1/3을 썼던 시간이 지나고, 1/4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책상 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




별것도 아닌 긴 고민 끝에 나는 연필꽂이를 바꿔보기로 정했다. 대단한 변화가 아니지만 그래도 공간 활용이 좋아 보이는 연필꽂이를 주문하고, 택배가 와야 치우겠다고 하며 또 시간을 미뤘다. 그렇게 미룬 시간의 끝이 다가오자, 내방늘보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시작한 청소.

내방 책상 위엔 정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어! 이게 여기 있네’, ‘에라이 여기에 있었구나!’를 반복했다. 대체 왜 홍삼은 책꽂이에 꽂혀 있었는지... 책 사이사이에 참 안 보이게도 꽂아 놓았더라.      


책상 한구석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던 화장품 코너로 자리를 옮겼는데...  와... 하나같이 유통기한이 지나있었다. 평소 화장을 잘 안 하는 나이기에 많은 화장품이 있진 않지만, 그래도 한번 꽂히면 조금 비싼 템들을 지르곤 했다. 게을러서 안 쓴 것도 있지만, 제대로 화장할 때 써야지! 했던 물건들은 모두, 앙 다문 뚜껑을 열어보질 못했다.       


'고작 몇 개월 지났는데... 그냥 써?'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했지만, 코로나 이후로 집에 칩거하며 기초도 안 하는 나인데 무슨 색조인가.... 그렇게 모든 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버리고 버렸지만, 난 아직도 청소가 덜 끝난 내방 책상 1/3을 이용해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징한 인간이다 정말...     


이 작은 공간엔 내가 구매했지만 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한 달을 기다려서 받은, 미국에서 물 건너온 타자기 스타일의 키보드(정말 예쁘다). 두 번 날고 다신 날아오르지 못한 나의 드론. 정기구독에 꼬박꼬박 돈을 내며 한 번도 제대로 안 읽은 시사인.... 이 외에도 수많은 물건들이 내 방에 와서 빛을 보지 못한 채 먼지만 맞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최고 가격에 모든 것을 구매했고, 이들은 내방으로 도착한 이후 그저 값어치만 떨어진 채 멀뚱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언니는 항상 말하곤 했다.      


동그라미,
넌 반짝반짝 빛나게 될 거야.     


내 눈에 항상 빛나던 사람이 한 말이었다. 그저, 내가 동생이기에 한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스무 살이 넘으면서 어렴풋이 내가 잘하는 것을 눈치채기도 했고, 사실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몇 번의 상처를 받으며 나도 모르게 방어적 인간이 되어갔다. 좋은 기회라고 잡아보라고 하던 사람들에게 난 항상 말하곤 했다. “그건, 나한테 기회 아니야.” 그렇게 내가 나를 보호한답시고 웅크리고 있는 동안, 나의 아이디어들은 뽀얗게 먼지가 쌓였고, 유통기한이 지나기도 했다.     


몇 년 전, 개인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나의 오랜 절친은 말했다.      


난 있지,
너희 언니가 너한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지 않았어.
그 말이 되게 인상적이었거든.

옛날엔 그 말이 뭔지 몰랐거든.
'당연히, 동그라미 언니니까 그렇게 말했겠지
근데, 그 말 참 예쁘네' 싶었지.

그런데.. 긴 시간
너의 머릿속 세계를 보면서
너희 언니가 본 게 이건가 싶더라...

내 생각엔 뭔가 있을 거 같아.
니가 스스로 빛을 못 내게
차단하는 무언가가...
뭔가로부터 널 보호하려고..
상처 받기 싫어서...


그날, 촬영을 하고 돌아와 밤새도록 울었다.           




어쩌면, 아직도 난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상처 받는 것에 대해.

 



며칠 전, 언니와 술 한 잔을 했다. 언니는 그때와 하나도 변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열심히 좀 해.
넌 간절하지가 않아.

그냥, 계속 쓰기만 해.
어떤 형태로든 너에겐 기회가 올 거야.     


대체 무슨 근거로 확신을 하는지... 그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 오히려 내가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난, 왜 그렇게 나를 아꼈을까?

아니, 어쩌면 나를 아낀다고 한 행동들이 날 아낀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보호한답시고 했던 행동들이 나의 아이디어들을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 꼴로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청소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좀 보인다. 내 책상의 변화가.


안 쓰는 물건들을 아까워하지 않고 다 버렸고, 필요 없는 문서들은 박박 찢어 버렸다.

이제, 나의 책상처럼 내 인생도 변화의 지점에 서있다.      


이젠 봐야겠다. 언니가 그렇게 확신하던 나의 빛.

엄청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내가 낼 수 있는 빛은 내보는 걸로.      


언니,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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