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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Aug 28. 2020

나는 왜 미루는가

내가 피하고 싶었던 것

왜, 대체 왜. 

나는 내일을 확신하는가.     




무료한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내일로 미뤄지고 있다. 딱히 바쁜 일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할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시간은 관련이 없다. 시간이 있어도, 시간이 없어도 나는 내가 할 일을 미루곤 하니까.      


미루는 건 나의 오랜 습관.


내일, 그리고 또 내일. 그렇게 미뤄온 일들이 매일같이 나의 일상을 누르고 있지만, 그 눌림마저 견디고 있는 걸 보면 난 참...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나의 책장 위엔 3월에 반품을 보냈어야 하는 물건이 있다. 이미 회사 측과 이야기가 다 되었기에 그냥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코로나 핑계로 하루 이틀 미뤄진 택배. 지금은 박스채로 먼지를 맞고 있다. 물 건너온 레트로 키보드, 제대로 비행을 못해본 드론, 마사지 기계는 중고로 팔겠다는 이야기만 거의 1년째 하고 있다. 1년 전 크게 났던 사고 때문에 보험처리를 해야 하는데, 이 또한 미루고 있다. 예전에 내방으로 쓰던 옆방은 창고가 되어 매달, 청소만 다짐하고 있다.


이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냥, 하루 날 잡고 시작하면 될 것을... 한 번 시작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는 걸 알면서 난 그저 오늘을 내일로 미루고 있었다.      




항상 데드라인이 있는 일은 꼭 마무리 지었다. 날짜에 늦는 것은 죽도록 싫었기에 밤샘을 하던 뭘 하던 결론을 냈었다. 마감을 몇 분 앞두고 하얗게 되어버리는 머릿속과 이성이 날아간 몸뚱이로 허둥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신, 이렇게 마감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난 매번 같은 짓을 반복했다.      


대체, 왜?      


어쩌면, 마감시간을 앞두고 미친 듯 두근거리는 심장과 롤러코스터 타는 듯한 기분을 조금은 즐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마감에 딱 맞게 원고를 넘기고 허... 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댈 때 관자놀이를 스치는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꽤 기분 좋게 느껴졌기에...      


안다. 

이렇게 저렇게 미사여구를 붙여봐야... 

다 변명이다, 변명.      




끝이 있었다.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었던 일들은 끝이 있었던 일이었다. 

끝이 분명하지 않는 일들은 다음, 그다음으로 미뤄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작 중요한 내 인생도, 

끝을 예상하지 못해 계속 미뤄졌는지도 모른다.      




미루면, 내일이 되었다. 

지금 당장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나의 민낯을 지금 당장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나의 바닥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나를 미뤘다.  

    

나에겐 항상 내일이 있었다. 

오늘도 난 여전히 내일을 계획하고 있다. 오늘 미룬 일들의 대부분이 내일이 될 것이고, 그런 내일이 또 한 번 모래가 될 것이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일 내가 또다시 눈을 뜨는 것에 대해. 대체 이 확신은 어디서 나왔던 걸까?     


만약, 나에게 내일이 없다면. 난 오늘을 미룰 수 있을까?      

내가 오늘을 조금 무책임하게 보내는 동안 나의 오늘은 내일의 짐이 되었다. 그렇게 쌓인 짐들을 1년이 넘어가면서 점점 무거워졌고, 그 무게를 해결하지 않고 눌리고 눌리며, 버티고 버티며 조금은 무기력하게 오늘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에게 너무 당연한 내일에 기대어.      




우울증이 심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순간에 있는 이들에게 정신과 의사는 ‘작은 성취’를 권한다고 한다. ‘책상 청소’나 ‘세수하기’ 같은 너무도 쉬운 일들을 리스트 업하고, 이를 하나씩 지워나가 보라고... 우울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건 정말 작은 성취에서 시작된다고...      


꽤 오랜 시간 나는 내 삶을 미루며 우울한 시간을 쌓아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이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작은 성취. 미뤄둔 일들을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결하는 것일지도. 그렇게 미뤄둔 일들을 해결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인정하기 싫은 나의 민낯을 보거나 나의 바닥을 마주하면서 괴로울 수도 있지만... 내가 일 년간 피해왔던 나의 모든 것들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기에. 이젠, 내가 미뤄온 일들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갈 때가 되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은 

데드라인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미뤄온 일들을 간단히 적어보기만 했을 뿐인데 한 페이지가 훌쩍 넘어갔다. 막상 노트에 적어보니 막연하게 날 짓누르던 일들이 고작 이런 일들이었나 싶기도 하다. 괜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고작’ 이런 일들로 인해 나의 하루를 우울하게 만들어왔었다니... 나한테 미안할 지경이다. 각각의 할 일들에 나 나름대로의 데드라인을 써넣었다. 내 인생의 데드라인은 알 수 없지만 미뤄온 일들의 데드라인은 내가 정할 수 있으니.      


난 여전히 내일을 확신한다. 

왜인지 몇번을 물었지만,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저, 내일을 확신할 뿐이다. 아니, 내일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젠 내일에 기대어 더 이상 나를 미룰 수 없다. 못난 부분도, 아쉬운 부분도 모두 나이기에. 멋지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내 리스트를 한 줄씩 지워가는 동안 내일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를 좀 더 좋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를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리스트 중 하나는 오늘 지우고 자야겠다.      


지금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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