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

맥주가 만든 상상

by 윈스턴

어느 날, 방에서 가만히 맥주를 한 캔 마시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사색하는 걸 좋아한다. 가만히 있다가 생각할 거리가 번뜩이면 한참을 재밌게 고민한다. 즐거운 상상을 하기도 한다.

내가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걸 가질까. 너무 강력한 능력은 안돼. 삶이 너무 지루해질 거야. 만일 능력을 가진다면 하찮은 능력을 가지고 싶다.

그저 내가 초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할 정도. 물을 술로 바꾸는 능력, 또는 스마트폰을 쥐고 있으면 충전이 되는 능력. 그런 아주 묘한 능력. 그저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약간의 충만함을 느낄 정도.

그래도 좀 더 생각해 보니 가지고 싶은 능력이 있다. 최선의 선택을 하는 능력, 육감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언제나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그런데, 나는 이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사춘기 땐 이런 생각도 했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아주 특별하지. 까마득히 높은 차원에서 내려왔어.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이곳에 왔지. 이전의 기억은 게임하는 동안은 잠깐 지워둔 채 이 삶을 즐기고 있는 거야.

나는 특별해서, 특별함이 가져다주는 권태로움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이번 삶에선 평범하게 내 능력을 조율했지. 너무 평범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약간은 높게. 백분위로 치자면 상위 49%로 조율해 둔 거야.

그렇게 나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평범하지만 발전 중인 한국에서, 평범하지만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는 지능과, 평범하지만 노력하면 살이 빠지는 몸을 가지고, 그렇게 살고 있는 중이야.


높은 차원의 특별했던 나는 알고 있을 거야. 결말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 존재는 결말은 최고로 행복하게 준비해 놓았을 거야.

아주 사소한 역경을 둔 채. 언젠가 뒤돌아보면 아주 하찮을 문제를, 그런 것들을 현재에 심어둔 채 말이야.


나는 아직도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 그리고 왜 그런지 눈물이 나기도 하지.

술 마신 후유증 같은 거라서, 다음 날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터로 나가.




‘어린 왕자’에 대한 책을 최근에 읽은 적이 있다. ‘어린 왕자’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책이었다. 책에 따르면 주인공으로 나오는 조종사는 저자 ‘생택쥐페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그런 생택쥐페리의 내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자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내용들. 책의 내용을 기억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책은 다만, 내가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래도 책에서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다.

‘사막의 여행자들은 어린아이로 돌아가기 위해 어른이 되었다’

울림이 있었던 이 문장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어린아이는 자각하지 못한다. 내가 어린아이인 것 정도는 알지만 더 성숙해진 나의 모습을 모른다. 그래서 어린아이로 남고 싶지 않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 내가 성숙해지면, 그러면 난 따듯한 온실 안에서 놀던 어린아이가 보일 것이다. 두려운 것도 많았지만 행복한 것은 더 많았던 시절.


그래도 난 어린아이가 되고 싶지 않다. 어른이고 싶다.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을 가진 어른이고 싶다. 내가 만일 어린아이가 된다면, 나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겠지. 그렇다면 어른이 좋은 거야. 어린 시절 바랬던 어른이 되어서 말이야.




나는 술을 싫어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강제로 먹다시피 한 술 때문에 별로 좋은 추억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실습을 마치고 4학년이 되니 동기들과 마시던 술이 너무 좋아서, 그렇게 술을 좋아하게 되었다.

혼자 마시게 된 것은 실습생이었을 때다(모든 문제의 시작은 실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불만은 다 토해내면서 밀러 병맥주를 마셨다(배 안에서는 맥주를 면세 가격으로 구할 수 있다). 양이 넉넉한 코스트코 감자칩과 함께.

그날에 맥주를 마시며 틀어두던 노래들은 가끔 멜로디만 들려도 우울한 기분이 되살아난다.

노래의 제목도 잊었다. 분명 신나는 노래였는데.

지금은 술을 좋아한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같이 얘기하며 마시는 것이 제일 좋지만, 조용히 혼자 맥주 두세 캔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아주 천천히 마시다 보면 기분이 살짝 올라간 채, 혹은 살짝 내려간 채 머무르는 시점이 있다.

그때 머리에 드는 생각들은 나를 재밌는 사색의 세계로 인도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 행복의 문제, 이데아는 있을까, 나는 존재하고 있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정신이 너무 멀쩡하면 이런 생각을 못한다. 하는 고민이라고는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주식시장의 추세가 어떤지, 내일 작업할 일들이 무엇이 있는지, 이런 당장 눈앞에 있는 일들밖에 떠올리지 못한다.


나는 죽음에 문턱에 있어도 후회하지 않을 삶이 어떤 것 인지 고민하고 싶다. 조금 우울하지만 무조건 해야 하는 고민들.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그런 기억들은 저 멀리 보내버리고 오늘 하루 먹고 살 고민으로 뇌를 가득 채우며 하루를 보내겠지, 그러다가 뇌가 알코올에 살짝 담가지면 깊은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는 거야.


하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선 해결책을 내지 못한다.

그런 상태의 반복이다.

오늘도 해결책 찾기는 글렀다.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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