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李箱 건축무한육면각체와 < 2인 1, 2 >
지금 이상의 시를 다시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다시 읽게 된 것은 자세히 읽어 본적이 없어서다. 특히 그가 쓴 일본어 시는 잘 몰랐다. 대학 교수로서 정년이 가까워오면서 시간이 허락했고, 일본어시 28편은 잘 모르겠어서 시작했다.
그가 건축학도여서 특히 건축학부 교수로서 관심이 갔을 뿐 아니라, 읽을수록 기존의 국문학자들의 해석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나씩 천천히 시작해 볼까?
이상(李箱)의 1931년이 중요한 해다.
이상(李箱)의 27세 삶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제1기(1910년(출생) - 1926년(17세))의 특징은 가족사에 얽힌 그의 정신적 상흔의 기간이다.
신명학교 4년 졸업(1917년 4월 – 1921년 3월)후, 동광학교-보성고보 5년 졸업(1921년 4월 – 1926년 3월 5일)하는 기간으로, 경성고공에 들어가기 전까지 상상력으로 젊은 시기를 보냈고, 불행한 가정환경이 특징이다.
제2기(1926년(17세) - 1930년 5월(20세))의 특징은 화가의 꿈을 포기한 후 건축을 택하고, 경성고공 입학부터 조선총독부에 2년여 근무한 기간이다. 경성고공 건축과(1926년 4월 – 1929년 3월)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건축과(1929년 1일 – 1929년 11월), 관방(官房)회계과 영선계(1929년 11월 – 1933년 2월)에서 기수로 보낸 기간 중 전반기에 해당하는, 건축과 직장에 대한 꿈을 펼치는 시기이다. 그림과 건축을 양립하고 취미로 글을 쓸 수 있었던 그에게 황금기이자 작품 배양의 보고였다.
제3기(1930년 5월 (21세) - 1932년 (23세))는 조선총독부 관방(官房)회계과 영선계(1929년 11월 – 1933년 2월)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마찰을 겪으며, 건축보다 문학에 관심이 늘어난다. 도리어 정신적으로 꿈의 세계는 유럽과 미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글에 단서가 보이지 않는 모종의 사건(1930년 4월 26일로 추정)이후 시기로 결국 퇴직하게 되는 불안한 시기이다.
제3기 중 1931년을 부각시킨 이유는 1930년 4월 26일 “죽을 수도 없는 실망”(소설 12월12일)을 겪는 일로 추측되는 사건으로부터, 1933년 2월 17일 총독부를 그만두게 되는 통고를 받았다고 추측되는 동안(가구(街衢)의 추위)의, 심적 고통이 시로 표출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고, 1931년 6월 5일부터 계속적으로 발표되는 일문시(日文詩)들에 이상의 생각들이 몸 안에서 용해, 응축되어 표출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외부의 압력이나 이상에 거는 기대, 그리고 이상 자신의 반응과 고뇌가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4기(1933년 2월(24세) - 1936년 10월 17일(27세))는 운명적 모색기여서, 건축 대신에 건축인테리어 작업을 하는 동시에 문학에 몰두하며, 일본어보다 한글로 글을 쓰는 시기이다. 금홍이를 만났고, 다방 실내건축(인테리어) 성과도 뜻한바 대로 되지 않고 경제적 여건도 나아지지 않았으나, 작품을 왕성하게 써내려 간 시기이다.
제5기(1936년 (27세) - 1937년 (28세))는 칩거와 결혼에 이은 일본으로의 급작스런 출항 이유는 아직 미스테리에 속한다.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을 맞이하면서도 무모하게 유토피아 행로를 찾아 일본으로 떠난 시기이면서 자신에게 마지막 시기이다.
이상이 제3기에 집중적으로 작성한 초기 일본어 시들이 충분히 해독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일제 아래 드러내 놓고 꿈을 꾸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 공간에서, 유럽과 미국의 현대건축의 위용을 해외잡지로 보며 참아야 하고, 더구나 일본건축을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에서, 하고픈 직책도 맡을 수 없어 어떤 건축도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일이 막히면 새로운 일을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손이 점차 자신의 앞길을 막아 일을 못하게 될 때, 산업과 재정 여건이 형성되지 않아서 원하는 실내건축(인테리어)은 불가능할 때, 그의 얼굴에 고뇌가 나타났다. ‘원’과 ‘선’으로 대별되는, 서울과 동경-이중 구조의 투철하고 치열한 투쟁 속에서 이상은 고뇌했다.
그 고뇌의 중심에 등장한 미지의 프랑스 여인. 그의 일본어 시에는 프랑스 여인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일본의 외력에 밀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점차 모든 수단이 잘려 나갈 때, 그가 선택하는 길은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비밀 없는 삶을 저주했던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고 비밀을 철저히 유지했고 결국 성공했다. 일인(日人) 또는 일인 경찰에 까발려진 자신의 삶 때문에 더욱 그러했는지 모른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박차고 일본행을 결행한 순간, 우리는 나약하지만 의지와 확신에 차서, 끝없이 미지의 세계로 나가고자 한, 예술가, 건축가 지망생, 시인, 소설가 그리고 영화애호가인 문화게릴라, 아방가르드 이상(李箱)을 만나게 된다.
이상 삶의 다섯 부분 중, 제3기의 1931년에 발표된 일본어 시들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상(李箱)은 ‘조선과건축’(朝鮮と建築)에 28편의 시를 발표했다. 1931년 7월호에 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표제로 6편의 시를, 이어 8월에 日文詩 <조감도(鳥瞰圖)> 표제로 8편을, 같은 해 10월에는<3차각설계도> 표제로 7편을, 그리고 다음해 1932년 7월에 <건축무한육면각체> 표제로 7편의 시를 연작시로 발표했다.
김윤식은 이상 문학의 텍스트에 대하여,
“어째서 유독 이상은 ‘나=이상’을 깃발처럼 내세웠던 것일까.…… 사람들은 소설(작품)속의 인간(나=이상)이란 현실의 인간(나=김혜경)과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기’가 아닐 수 없다. …… 텍스트 자체가 ‘인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
이상이 사용한 可逆反應, 直線 影響 便秘症 內面 勞動 獨立 戰爭 想像 顯微鏡 希望 등은 일본어의 직역이라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서구 모더니즘 표현 체계의 직역 …… 일본의 모더니즘 시가 ‘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능히 이루어 냈다는 인식에 도달한 가와무라 씨의 견해는 ……
일본 시가의 전통성(일본어 서정으로서의 운율, 감정 등등)이 워낙 강해 이를 극복하지 못한 까닭, …… 이상의 일본어 시는, 이러한 부담감이 없었으므로, ‘가장 인공적 언어’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며
(김윤식,「텍스트로서 일어시(日語詩)가 놓인 자리」,『이상 문학 텍스트 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1998년, 112~113쪽. 125쪽. 134-135쪽)
이상의 시가 일본어 뿐 아니라, 한국어에서도 언어가 순수한 ‘기능어’로서 한, 일 양국의 모더니즘 시에서 그대로 기능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