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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r 21. 2018

나의 뒤늦은 사춘기


 계절학기를 듣던 작년 여름, 오전에 중간고사를 보러 학교에 갔었다. 수시 면접날인지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과 학부모들로 학교가 붐볐다. 다들 뭔가 준비한 것들을 긴장한 얼굴로 열심히 읽는다. 또 면접이 끝나고 나왔는지 웃으면서 건물을 나오는 친구도 있고, 부모님께 기대어 우는 친구도 있다. 손을 꼭 마주잡고 기도하는 모녀도 보인다. (나는 수시 면접을 준비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다소 생소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눈 앞의 광경들에 기분이 참 오묘해졌다. 도대체, 대학이 뭐라고… 대학이 뭐길래, 왜 그렇게나 간절한 것이 되는 것이며, 왜 그리도 간절해야만 되는 걸까? 누군가 그렇게 간절히 열망하는 걸 쥐고 있는 나는 정작 오늘 아침에 '주말 아침에 중간고사라니… 학교 가기 귀찮은데…' 따위의 생각이나 하면서 등교했는데. 나도 한때는 그렇게 간절했을까? 나는 이미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절함도 감사함도 잊어버리게 된 걸까?




 어쩌면 누군가는 나를 부러워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외려 간절함이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썩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하지만 지난 학기에 나는 정말 공부를 안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건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낮은 학점을 받게 될 것보다, 그래서 취업이 안 되면 어쩌지?, 대학원에는 갈 수 있을까?하는 걱정보다 날 힘들고 슬프게 하는 건 내가 점점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인간이, 개성 없고 대체 가능한 무채색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은, 지울 수 없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ㅡ내가 원하는 공부가 아닌,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나에게 기대되고 요구되어온ㅡ공부를 해 온 근본적인 이유는 항상 불안감에 기인했다. 그게 어떤 불안이냐 하면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내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 내가 어느 정도 그들의 기준에 미치는 대학엘 가지 못하면 /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 내가 정말 내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없게 된다면 /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이나 결과를 보인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나를 등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물론 이제 와서 그렇게 해 온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공부와 내 삶이 나쁘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대학을 오기 전에 좀 더 고민하고 방황했더라면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하는 인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저 평균적 인간의 대열에 끼워 맞춰진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가치에 나를 끼워 맞추기 바빴으니까.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들이/사회가 원하니까, 그저 인생이 행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학기, 아니 어쩌면 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이런 생각들 때문에 너무나도 괴로웠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 자아에 집착하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니까. 매번 자의식이 나를 좀먹기 직전까지 생각을 몰아 부쳤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었다. 


 공부는 왜 하지? 지금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더 나아가서 앞으론 어떻게, 그리고 왜 살아야 하지? 


 스스로에게 계속 의미를 물을 때마다 역설적으로 나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갔고 무기력해질 뿐이었다. 그러나 ‘왜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같은 물음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었다. 사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건, 간절하게 만드는 건 사랑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하고 있는 공부들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간절함도 성취감도 없었던 거다.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이걸 계속 해나가는 이유도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았던 거다. 수험생 시절 언젠가 의미도 모른 채 메모해 두었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로 시작하는 기형도의 시처럼, 대학에서 배운 모든 지식들이, 나의 시간이, 내 자신이 영원히 빈 집에 갇혀버리게 될까 두려웠고, 지금도 여전히 두렵다.



 대학에 막 입학한 3월 처음으로 충동적인 무단결석을 하고 홀로 삼청동에 갔던 날이 있었다. 그냥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지하철을 타고, 걸어갔다. 이젠 더 이상 '수학은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아' 애써 생각하며 수학문제를 꾸역꾸역 풀고 앉아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습시간에 수능특강이 아닌 책을 펴 놓았다고 한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공부 안 하냐 질타하는 어른들이 없다는 것, 수능이라는 타율적이고 건조한 목표만을 바라보며 공부도 되지 않는 책상 앞에 하루 종일 처박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마냥 해방감과 쾌감만을 느낄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해방감을 앞질렀다. 이제는 내가 아무 말 없이 수업을 가지 않아도 나를 혼내거나, 질타하거나, 내가 출석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이유를 물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나에게 이유를 묻는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스스로 이유를 찾아가야 했기에 방황했고, 여전히 방황 중에 있다. 문득, 공부를 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무단결석을 한 그 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가고, 뜻밖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을 이끌어내는 것. 끊임없이 절망하면서도 계속 이유를 물어가는 것.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 지 모르겠다. 무언가 특정한 사건을 통해 교훈 따위를 얻은 것도 아니고, 나의 방황은 아직 진행중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해결책도, 열렬한 고무도 없다. 공감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열심히 생각하고 방황하는 당신에게 조용히 응원을 보내고 싶다. 당신이 누구든지 말이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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