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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Apr 03. 2018

There is no royal road

고등학교 2학년 여름이 지날 때까지 영어를 심각하게 못했었다. 어느 정도로 못했냐면은 보는 시험 족족 내신, 모의고사 5~6등급. 무엇보다 그걸 다 떠나서 2학년 1학기까지 4형식 문장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영포자'같은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법 강의도 열심히 듣고,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지문 내용 정리도 깔끔하게 도식화해서 해 보고, 효과적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공부법들도 따라하면서 별짓을 다 해 보았는데 그 정도 실력이었단 거다. 당시 집안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터라, 사교육을 받을 만한 환경도 아니었다. 그래서 ebs 영어강의를 들었는데 그마저도 영어 성적 향상에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댔으니 못했던 게 당연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객관적으로 진단하지 못했고, 적은 시간을 들여 적게 공부하면서 성적만 대폭 상승하기를 바랐으니까. 한마디로 효율만을 좇았던 것이다. 가정법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이해가 아예 안 되어있는 상태에서 백날 '가정법, 가정법, if… 과거… if I were a bird…' 하고 있으니, 당연히 못 할 수밖에. 영어 문장에 대한 이해는 없으면서 정답지에 있는 한글 해석을 보고 지문의 내용이나 정리하고 있으니, 그게 한국어 공부지 영어공부는 아닌 거지. 문법 강의를 듣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문장 구조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5형식 동사들을 죽어라 외우고 있으니 성적이 안 오르는 건 당연했다.


당시 공부했던 노트. 두꺼운 노트 두 권을 꽉 채웠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많이 좌절했다. 아, 나는 그냥 머리가 나쁘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구나.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좌절과 함께 오기가 늘었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무작정 교과서와 부교재에 있는 영어 문장들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모의고사는 제쳐두더라도 내신이라도 잘 해보자, 하는 심리였다. 조동사니 뭐니 하는 머리 아픈 문법 따위는 일단 싸그리 무시한 채 정말 무식하게 문장 하나하나를 한글 해석과 대조하며 씹어 먹다시피 외웠다. 그때엔 거의 공부의 8할을 영어에 투자했다. 자습시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도 쪼개어 영어 문장을 외우는 데에 매달렸다. 소리 내어 읽고, 따라 쓰면서 정관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완벽히 외우려고 노력했다. 한글 해석을 보면서 외운 영어 문장을 써 내렸고 원문을 보며 첨삭했다. 단어는 따로 외우지 않았다. 그냥 문장을 외우다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문장과 함께 그 단어의 뜻을 자연스럽게 외웠다. 그렇게 40여 개 정도 되는 지문들을 외워 시험을 봤고, 처음으로 영어 과목에서 1등급이라는 성적을 받아보게 되었다.


물론 모의고사나 수능은 내신처럼 달달 외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적이 학교 시험인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비례해서 오르진 못했다. 수능을 위해선 고3 내내 사설 인터넷 강의를 따로 수강했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그 '무식한 영어공부법'은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다시 문법을 정리하는 데에 있어서도 내가 그동안 어떤 것을 몰랐는지,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스스로에 대해 꽤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전과 다르게 배운 것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처음 보는 지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문장 구조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읽혔다. 아쉽게도 수능에선 1등급을 받지 못했지만 영어 성적에 대한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만큼은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까.



이 글을 통해 '제가 이렇게 해서 효과를 봤으니 여러분도 이렇게 공부하세요' 하려던 건 절대로 아니다. 다소 효율적이지 못할뿐더러, 나 보고도 다시 저렇게 하라면 절대 못 할 것 같다. 혹시나 세세하고 효율적인 공부법 전수(?)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공부법을 찾으면 된다. 그렇지만 너무 효율만을 좇지는 않았으면 한다. 지금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당시 나를 되돌아보면, 그 ‘무식한 암기’라는 비효율적인 공부 방법이 (특히 언어를 학습하는 데에 있어서) 역설적으로 효율적인 공부였다고 생각된다.


공부를 함에 있어 효율성은 참 중요하다. 그러나 효율에 얽매이다 보면 오히려 비효율을 초래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효율'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대체로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빠르고 쉬운 방법만을 찾는다. 시간이 걸리고 어려워 보이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내가 그랬었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를 하다 보면 그런 나태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꽈리를 트는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빠르고 쉬워 보이는 방법도 자세히 살펴보면 과정이 결코 빠르거나 쉽진 않다. 세상에 조금의 수고로움도 없이 이룰 수 있는 일들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진도 빼기에 급급해서 무언가를 빨리빨리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게 아니라, 느리더라도 올바르고 정확하게 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효율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사실 공부뿐 아니라 무엇이든 다 그렇지 않을까 싶다. 아 참, 물론 정확하게 한다는 게 세세한 내용 하나하나까지 파고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해가 모호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어떤 것을 모르는지 알아야겠지. 나는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최고의 무지라고 말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고 그 부분을 보충해 나가는 것이 올바르고 정확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마 배움에 있어서 왕도(王道)는 정도(正道)이고, 정도(正道)가 왕도(王道)일 것이다. 그것이 입시이든 대학에서의 배움이든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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