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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09. 2018

거절학개론

상대의 부탁이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어렵다. 내가 그렇다. 잘못 거절했다가는 냉혈한이 되기도 하고 개인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심하게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리기도 한다. 그놈의 정 문화가 뭐라고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거절을 하면 "쟤는 가벼운 부탁도 안 들어주는 사람이야"라든가. "쟤는 어쩜 자기 일만 하니"라든가. 그런데요, 부탁을 들어주고 말고는 제 마음 아닙니까? 게다가 정말로 무리한 부탁을 하면서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죠?"라는 뉘앙스를 풍기면 피가 끓는다. 예전에는 냉혈한으로 매도당하는 게 무서워서, 착한 이미지로 남고 싶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에 부탁이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근데, 부탁이라는 걸 한번 들어주면 무슨 게임의 퀘스트 하듯 점점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보상은 갈수록 없어지더라. (아니 애초에 성의표시나 감사인사도 없었던 것 같기도) 최근 들어서 부탁이나 요청을 받았을 때 거절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여전히 거절이라는 행위를 잘하지 못하는 거절초보자로, 어떡하면 인간관계에 금이 가지 않으면서 예의 있게 거절할 수 있는지, 나의 거절방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나는 녹차라떼를 좋아해.


돌려서 거절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무보수 부탁을 거래로 바꿀 수 있는 스킬이다. 사실 거절이라기보다는 퀘스트 수락 전 퀘스트 보상을 내가 선택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대부분 부탁을 하는 상대들은 감사의 표시로 말이라도 "밥 한번 살게", "차 한잔 살게"라고 하는데, 감사하다는 말도 혹은 밥 한 번 사겠다는 말도 없는 상대라 언젠가 벼르고 있긴 했다. 아무렇지 않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상대에게 웃으면서 맥락을 끊고 했던 말이었다.


"오늘 수업 녹취본 있어?"
"어, 나는 녹차라떼가 좋아."


교양수업에서 만난 사람, 수업 듣기 싫어서 수업 줄줄이 빠지면서 시험기간이나 레포트 제출기간에 교수님 강의 녹취본을 달라고 하거나, 어제 교수님이 수업에서 뭐했냐고 물어보거나. 처음에는 가볍게 바로바로 응답해줬는데 나중에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고, 갈수록 아무렇지 않게 부탁을 하더라. 그래서, 얘기했다. 이 스킬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악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해야 한다는 것이고, (온라인 메신저에서는 가장 익살맞은 이모티콘을 곁들여 보내야 한다) 어렵고 힘든 부탁일수록 비싼 단어, 혹은 귀찮은 보상을 요구하는 말로 바꾸는 것이다.


응용법)
-요즘 연어가 그렇게 제철이라면서?
-나, 아직 교촌 허니콤보를 먹어 본 적이 없어.
-학교 앞 카페는 아이스티(아메리카노 말고 아이스티 맞다.)에 에스프레소 샷 추가해달라는 주문을 들어주더라.


나에게서 이 거절법을 배운 모 동기는 교양 조별과제에서 무리한 부탁을 한 사람에게 이 방법을 써먹었다고. 너무나 유익하다고 하더라. 거절하기 애매한 부탁을 수락할 때 감사의 성의표시를 미리 제시해 보상을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나 간식으로 받을 수 있는 점이 제일 좋았단다.




2. (응답 없음)


온라인 메신저에서 가능한 거절법이다. 요청한 기간이 지난 후에 읽고 "헐 미안 내가 이제 봤네" 혹시라도 읽었다면 "요즘 폰이 이상해, 읽지도 않았는데 읽었다고 그러네."라고 메세지 하나만 보내면 된다. 이미 지난 일인데 어쩌겠어. 왜 안 읽었냐고 화를 내겠는가, 아니면 내 휴대폰을 새로 사 줄건가. 이건 정말정말 가끔 내가 온라인 상에서 쌍방향적인 의사소통이 지쳤을 때 미리보기로 봐 놓고서 나중에 응답하기로 미룰 시에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말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애프터 신청을 해서 이틀 뒤에 답했던 기억이 있다. 대화도 재미없어서 쌍방향적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몇 번 더 이 기술을 사용한 후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겼다.


"이 영화 요즘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보실래요?"

(이틀 뒤)

"아이고ㅠ 제가 이걸 이제 봤네요. 죄송해요ㅠ 근데 그 영화 이제 상영 내렸죠?"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대놓고 "아니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더 좋은 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말도 들었었는데, 그래서 그 이후로는 확실하게 말하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조금 시도하기에 다소 개인차가 발생할 수 있는 거절법들이다.





3.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말하며 최대한 언짢은 표정을 지어라. 나 같은 경우에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은 웃으며 말한다. 상대가 들어주기 벅찬 요청을 하거나, 멍청한 말을 했을 때 하면 유용한 대처다. '네가 지금 얼마나 거절하기 힘든 요청을 하는지 알아?', '이게 얼마나 불쾌한 말인지는 알지?'라는 표정을 지으면 개중 절반 이상은 사과하더라. 굳이 요청이나 부탁을 들어주는 반응이 아니더라도,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거나 무례한 말을 했을 때도 쓰는 반응이다. 기분이 상했으면 기분이 상했음을, 언짢으면 언짢았음을 드러내야 한다. 감정을 표현해줘야 알아듣고, 반성한다. 나 같은 경우 명절에 이모부가 적절하지 않은 발언을 하거나, 여자들이 일하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면 자연스럽게 언짢고,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cf. "넌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상대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함을 준다. 상대는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새벽에 얘기한 게 문제인가?', '말투가 무례했나?', '도대체 무슨 의미지?', '내가 뭘 잘못했지?' 상대는 사과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무슨 의미냐고 묻곤 한다. "아니, 그냥 넌 그럴 것 같았다고." 정말 그게 전부야.




4. 아니, 싫어.


가장 힘들고 어렵지만, 처음만 그렇지 가장 편안한 거절법이다. 맨 처음에 단호하게 "싫어", "아니"라고 말해줘야 그 뒤로 귀찮고 사사로운 부탁을 하지 않는다. 들어줄 부탁도 처음엔 거절하고 나중에 들어주면 '부탁'은 상대가 거절할 수 있는 일임을 깨닫고, '나'는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는 존재, 들어주고 싶을 땐 들어주는 존재로 인식한다. 최근 들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이기도 한데, 단호하게 거절을 하면 그제야 본인이 얼마나 어려운 부탁을 했는지 아는 것 같더라.


부탁하는 처지에 무례하게 말할 때도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데, 그럼 정말 부탁하는 입장이 되어서 다시 오거나,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한다.




부탁을 들어주는 우리는 "을"이 아니다, 오히려 "갑"이다.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정말 우리의 자유이고, 부탁하는 사람의 눈치를 볼 일이 아니다. 하기 싫은데 부탁을 받아서 억지로 일을 하지 마라. 반대로 부탁할 때는 진심으로 부탁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얘기하자. 그리고, 상대가 언제든 거절할 수 있음을 인지하자.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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