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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19. 2018

프로그램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상(像)은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다. 윤리적으로도,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도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불평등 사회로 손꼽히는 한국 사회도 풍요로운 시절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는 피폐해졌다. 국가는 부도가 났고 IMF의 프로그램을 수용하며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낯선 경제 이념이 들어왔다. 청년실업, 고용 불안정, 허약한 노동권과 복지 시스템, 재벌 독과점 체제,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이 그 단면이다.


 시대의 표징(表徵)이다. 부정적인 현상의 이면에는 비뚤어진 형상(形象)이 있다. 개개인의 내면에 새겨진 가치관의 형태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고 그것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평등이 본래 내재한 가치는 선(善)과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굴절된 평등은 폭력과 불행을 수반한다. 불평등 사회의 철학은 평등한 불행이다.



 이는 사다리 논리로 구체화된다. ‘사다리 걷어차기’는 모두가 분개하는 일이다. 정의에 대한 열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문제는 사다리와 함께 불합리한 구조가 존속된다는 점이다. 평등의 기초는 합리성과 다양성인데 사다리는 경쟁질서와 획일성을 속성으로 한다. 사다리 세계관의 핵심은 사다리를 올라가야 행복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행복할 권리가 사다리에 조건적으로 존재한다. 이를 이데올로기로 강제했다. 행복할 권리가 부당하게 제약되는 현실을 사다리 프레임으로 은폐하고 문제의식을 마비시켰다. 


 행복할 권리는 사다리와 무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기본 원칙이다. 소수의 사람이 진흙탕에서 사다리 타고 계층 이동하는 건 정의로운 게 아니다.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보다 사다리에 올라가도록 강제하는 환경이 문제인 것이다. 사다리는 착취를 정당화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대표적인 사다리 시스템이 대학이다. 한국에서 대학은 학문기관이 아니라 신분이다. ‘지잡대’를 나오면 불평해선 안 된다는 게 엄정한 윤리다.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면 존엄을 누릴 수 없다고 여긴다. 당당하게 멸시한다. 경쟁에서 낙오하면 행복할 권리를 잃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불행한 10대를 보내야 한다. 사다리에는 개인의 성향, 선호, 재능, 개성, 정체성이 설 자리가 없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일률적 경쟁을 내면화한 학생들이 가학적 이데올로기의 첨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계급 사회, 차별, 억압, 줄 세우기의 수호자를 자임한다. 봉건 신분제의 하수인이다. 



 최근 폐지된 사법고시도 같은 성격이다. 사시에 합격하는 숫자는 극히 소수다. 대부분 고시 낭인이 되어 노량진 고시원을 전전한다. 노무현 뒤에는 수많은 낙오자가 있다. 고시는 본질적으로 도박과 같다. 한탕주의다. 고시에 매달리다 보면 사람이 폐인이 된다. 로스쿨 제도를 두고 비용 문제를 거론하는데 고시 준비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 돈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도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법시험 존치는 ‘개천용’이라는 타이틀 아래 평등 이념을 상징하게 됐다. 법률가를 벼슬로 보기 때문이다. 신분 상승 제도를 폐지한다고 하니 ‘불평등’으로 인식된 것이다. 하지만 법률가는 벼슬이 아니라 해당 분야 전문인이다. 특별할 이유가 없다. 법률 서비스를 받는 데 있어 유익한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법 전공자라서 조금 아는데 일반인에게는 사법시험 제도보다 로스쿨 제도가 유리하다. 간단한 타산도 하지 못하고 신분제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다리 메커니즘에 의해 사물의 본질은 실종된다. 


 내용의 합리성보다 형식의 공정성을 따진다. 공정성의 실체는 다양성이 말살된 전체주의다. 표준인간을 강제하고 모두가 표준인간이 되어 불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평등이라고 믿는다. 불행 공동체다. 그 결과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수천만 원짜리 대학 졸업장을 들고 공무원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불평등 사회의 아름답도록 평등한 모습이다.



 군사독재는 끝났지만 여전히 파시즘(fascism)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징병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대신 징병 확대를 주장하는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불쾌한 이데올로기에 천착하는지 알 수 있다. 불행에 있어선 보편적 분배를 주장한다. 물귀신이다. 절대다수가 신음하는 불행의 에너지로 작동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파괴적인 감정이 사회에 만연한 이유다.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공동체는 결국 폭력적인 질서에 의해 결렬한다. 


 현재의 20대는 비뚤어진 가치관을 충실히 학습했다. 극우단체가 조직되는 등 비정상적으로 보수성이 강하다. 어느 세대보다 비열하고 야만적이다. 직면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냉소와 반동으로 표출된다. 정의와 윤리, 관용과 존중, 민주와 공존 등의 가치를 혐오하는 안티테제가 됐다. 20대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손해 보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 부끄러움, 수치(羞恥)를 모른다. 퇴행의 증상이다. 정의당의 김종대 의원은 이를 두고 ‘소화하지 못하고 구토하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일그러진 20대의 모습이 한국의 자화상이다. 1997년 이후 사회의 성격이 세대의 성격으로 발현된 것이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대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를 내면화한 흑인의 심리가 드러난다. 이들은 지배자가 주입하는 논리를 내면화하고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소속된 그룹을 경멸한다. 자기부정이 이뤄지고 착취의 순환구조가 성립된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하면 자발적 노예가 된다. 우리는 사다리와 서열주의를 내면화했다. 이로 인해 낙오하는 것에 대한 집단적 공포와 불안이 발생했다. ‘하얀 가면’ 뒤에 숨어 획일화된 기준으로 평가받고 자신의 고유한 얼굴을 감추는 게 생존방식이 됐다.


 사회로부터 입력된 프로그램이 바이러스가 되어 정신을 좀먹고 있다. 불행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단절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유하는 힘이다.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다. 강제된 이념은 무엇인가. 내면의 동인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과연 타당한가. 내재된 독소를 제거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불합리한 체제의 구성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변화는 개개인의 성찰이 공명하면 따라오는 것이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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