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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May 19. 2018

학교폭력의 정당화

이유가 있는 폭력, 정도가 약한 폭력

 과거 전체주의가 저지른 학살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였다. 악의 평범함. 폭력은 정당화되어 일어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우리에게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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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 미묘하게 존재하는 따돌림을 보면서, 어딘가 마지노선이 있다고 느꼈다. ‘정상’에 대한 기준이 있어 보였다. “학교폭력이 잘못됐다는 사실은 알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나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실제 통계청의 아동청소년 인권실태조사(2014)에 따르면 ‘따돌림이나 폭력을 당하는 아이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문항에 ‘그런 편이다’라고 답한 비율은 40.4%다. 심지어 인터넷에는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의 특징을 정리한 글을 볼 수 있으며, 학교폭력에 혼자 끙끙 앓은 피해자의 대응 방식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교폭력에 이유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피해자. 피해자가 잘못했기에 학교폭력이 시작됐다는 논리다. 폭력의 시작과 결과가 모두 피해자로 귀결된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의 입장을 주변 사람과 공유하는 데에 유리한 가해자들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제외된 채 가해자들의 상황만이 공론화되고, 피해자들을 향한 부정적 프레임은 방관자들에게도 주어진다. 흔히 말하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피해자의 입장은 없다. 즉, 사회적 낙인이라는 평가는 개인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가해자들이 만든 가해자를 위한 논의에 불과한 거다. 가해자들로부터 전개된 편협한 시선.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의 명백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권력을 쥐고 있기에 발생하는 모순이다.


 필자는 학교폭력의 양상이 성폭력과 비슷하다는 걸 발견했다. 첫째, 여성들은 성폭력의 경험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 자신이 사회에서 낙인찍히기 때문에. 학교폭력 피해자들도 자신의 경험을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한다. 둘째,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 여성에게 묻는다. ‘네가 행동거지를 잘못한 거 아니니? 네 몸을 네가 잘 지켰어야지.’ 이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선생님들이 ‘네가 잘못한 것은 없니?’라고 묻는 모습과 똑같다. 한 마디로, 피해자에게 자기검열을 요구한다.

 그러나 모두 가해자들이 만든 이유이고, 가해자들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주는 이유에 불과하다는 것. 가해자들의 변명일 뿐,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폭력을 내몰고자 한다면 바로 이 폭력의 이유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순백의 피해자.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하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흠결이 없는 삶이란 허구이고, 이런 판단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 허지웅, ⌜나의 친애하는 적⌟



첫 번째 사족. 

 필자도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다. 그 감정을 부정해버리고, 억누르기란 힘들다. 하지만 미움이 자신에 대한 우월함으로 이어질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비웃는 조직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부정적인 면만을 들춰내 낙인찍어버리거나. 밉다는 감정을 합리화시키고자 타인이 비정상적이라는 근거를 가져오려 한다. 내가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전제가 필요한 거다. 하지만 무엇이 우월한 것인가? 우월하다는 기준은 어디서 시작했는가? 그 기준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에서 시작했다. -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사고. 우선 둘을 구분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가? 정상이라 평가받은 사람들이다. - 보편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 친구는 욕먹을 만해.’ 이 말의 함정. 마치 인간 사회의 진리를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권력자들이 스스로 만든 기준에 취해 세상을 자의식 속에서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의 말이다.


두 번째 사족.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평화학/여성학 연구자이신 정희진 교수님의 책이다. 잠시 요약해보면, 우리는 모두 이유가 있을 거로 추측하고 인과론을 원하기에, 악에 이유를 묻는다. 이는 피해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악의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피해자로써 이유를 통찰한다는 것은 ‘피해자 됨’을 의미하고, 자신을 악의 굴레에 가둔다는 거다. 하지만 자신이 피해자라는 인식부터가 삶을 잡아먹기에. 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부터가 많은 무게를 초래하기에. 악에 대응할 것이 아니라 무관심해질 것을 말씀하신다. 

 읽고 많은 공감이 갔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이유에 무관심해질 것인가, 이유를 찾을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 인식의 차이지만, 경험에 대한 나의 해방감을 다르게 열어놓는다. 악에 이유를 찾거나 받아들이지 않기를. 악이 순간에 그칠 수 있기를. 나와 당신 모두 응원한다.



 인간은 쉽게 이중 잣대를 지닌다. 타인에게는 안 되면서, 자신은 괜찮다. 여기서 정도의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사람보다 적당하다는 이유로 본질적으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거다. 때때로 나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안심하고는 하듯.

 특히, 이러한 ‘정도’의 문제는 폭력을 정의하는 데에 논의되어서 안 된다. ‘이 정도면 폭력이 아니지’라는 문장이 성립되어서 안 된다는 거다.


 첫째, 강도에 따라서 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한다면, 폭력의 단절이 아닌 ‘교묘화’를 꾀할 뿐이다. 때리는 행위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시선으로. 하지만 직접적인 행위부터 간접적인 시선까지, 이들은 모두 약자를 특정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폭력이다.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권력적인 인식 그 자체가 폭력으로, 폭력의 본질은 강도에 있지 않다.


 둘째, 폭력의 기준은 절대적으로 피해자에게 있다. 폭력의 정의에 가해자가 거들을 수 없다. 만약 폭력의 기준이 가해자로부터 정해진다면, 폭력이라는 단어부터 없었을 것이다. - 가해자 입장에서 폭력은 그저 피해망상인 경우가 대다수며, 가해자는 스스로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 그렇기에 폭력은 피해자의 단어고, 가해자가 가질 수 없는 단어다. 가해자 또는 제 3자가 ‘그 정도는 약과이니 폭력이 아니’라고 모든 상황을 무마시키는 시도는 성립될 수 없다. (간혹, 이렇듯 피해자들이 지닌 권력이 또 다른 ‘악’을 만들 수 있기에 피해자들의 말을 온전히 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프레임부터가 수직적인 위계의 시작이다. 가해자라는 위치가 이미 유리한 상태다. 가해자로 기울여진 저울에 평형상태를 데려오려면, 누구의 말에 힘을 실어주어야 할까? 애초에 시작이 공평하지 못한 저울이었기에, 권력은 의도적으로라도 피해자에게 주어야 한다. 이를 그들의 ‘특권’이라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간신히 저울의 평형에 가까워졌을 뿐이다)


 폭력에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도란 없다.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이 아니다. 강도가 약하니 폭력이 아니라는 말.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잖아?’라는 질문. 이들은 모두 가해자들의 비겁한 변명이자, 폭력을 감추는 폭력이다.



 따라서 폭력을 약자의 시선에서 정의하면서, 다수와 소수라는 수적인 상황부터가 폭력임을 인지해야 한다. 내가 반드시 누군가를 때리고 권위를 행세하지 않았더라도, 강자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권력이라는 것. 우리는 이를 자각해야 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강자임을 알고, 이제 나 자신을 조심하고 경계한다.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 변명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삶과 사회가 그 자체로 폭력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자아 반성의 고통을 체화시킨다. 


‘누구나 그럴듯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사랑을, 혈연을, 우정을, 금전을 위계를 빌미로 악을 행사한다.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란 그렇게 힘들다.’

 - 허지웅, ⌜나의 친애하는 적⌟ 


첫 번째 사족.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폭력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자극적이어야 대중에게 인기를 얻고, 성행한다는 점에서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쉽다. 잔인하고, 해결이 간단하다. 폭력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근거되지 않은 스토리다. 문제는 이런 미디어가 폭력에 대한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대중에게 심어주는데, 앞서 말했듯 미디어의 폭력은 극악무도해 일상의 작은 폭력을 폭력이 아니게 만든다.

 예방접종효과. 인간이 강도 높은 일은 겪고 나면, 그보다 작은 일에는 무뎌진다는 거다. 미디어로 인해 우리의 폭력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야 한다. 폭력으로 합의되기까지 엄격한 기준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폭력이 폭력임을 설득시켜야 하는 피해자에게 과중한 무게를 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폭력의 기준을 가해자에게 쥐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 번째 사족.

 우리 사회는 쉽게 희망을 좇는다. 행복이란 슬픔이 없는 상태고, 평화란 싸움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슬픔을 긍정할 때 삶은 삶다워지고, 평화란 싸움을 통해 달성하는 가치다. 부정적인 것을 바탕으로 긍정(positive)이 다가오지, 긍정만이 존재하는 긍정은 또 다른 부정(negative)이다.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상실 수업⌟

 우리 사회는 위와 같은 문장을 알아야 한다. 내면의 안정을 추구한 채, 자아 반성이라는 고통을 내몰아서는 안 된다.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회. 고통을 끌어안는 사회. 그게 성숙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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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가 폭력을 정당화시켜주지도, 정도가 폭력을 평가하지도 못한다는 경각심. 우리 사회가 진정 폭력을 떼어내고자 한다면, 폭력을 가리는 이러한 포장지를 꿰뚫어야 할 것이다.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거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굳건해진다.’

- 허지웅, ⌜나의 친애하는 적⌟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잣대를 근거로 폭력을 정당화시키지 않길.

이분법적 분류가 내면에서 사라지길 연습하고 또 반성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도 폭력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갖기까지 수많은 책과 배움이 있었다는 걸 고백하며, 이런 깨달음을 준 모든 책의 저자들과 교수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들의 생각을 읽으며 위와 같은 나의 언어가 생길 수 있었다. - 고루고루 언급하지 못함이 아쉽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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