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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Jun 01. 2018

조심해라, 주의해라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를 추모하며 쓰는 글

출처: 뉴시스, 구윤성 기자


며칠 전 오랜만에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요즘 텔레비전을 틀 때마다 들려오는 소식에 세상이 통 난리인 것 같다며 묵혀둔 걱정을 쏟아낸다. 평상시엔 서로 연락도 잘 안 하는 모녀지간인데, 서울에서 타지 생활하는 딸이 아무래도 걱정되긴 하셨나 보다.


“밤늦게 다니지 말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너무 튀지 말고, 사람들한테 잘해주지 말고…”


딸의 조심을 연신 당부하는 엄마의 말을 잠자코 들으며, 머리 위로 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걱정 많은 엄마를 걱정하는 내 가슴은 이내 크고 작은 돌멩이로 가득 찬다.


출처: 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지난 5월 17일은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였다. 강남역 살인사건, 한 여성이 노래방 공용화장실에 들렸다가 잠복해있던 생전 처음 보는 남성에게 살해된 사건이다. 그날 화장실을 다녀간 사람은 남자 6명이 더 있었고, 7번째로 들어온 첫 번째 여성이 살해되었다. 여성을 살해할 목적으로, 끝내 여성을 살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여성 혐오 논란이 불거졌지만, 검찰은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닌 '조현병 환자의 일탈'로 규정하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사건 이후 수많은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로 나와 3만 5천여 장의 추모 포스트잇을 붙였고,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피해자는 범인과 전혀 일면식이 없었으며 우연히  시간 자리에 갔다가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범행 대상이 되었다. 그냥 단지 나는 집에 있었고 그녀는 노래방 화장실에 갔던 것, 그뿐이다.


사건 이후 정부는 사건 발생 장소인 남녀 공용 화장실의 관리감독을 강화했고, 각종 치안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은 과연 실효성이 있었나.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대상 강력범죄(살인, 강도, 성폭력 등)는 총 3만 270건으로 2016년 2만 7431건이었던 것보다 10%가량 늘어났다. 공용 화장실에서 안전할 권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출처: 천지일보, 김민아 기자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사건’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아무 사람이 아니라 여성  아무 사람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살인사건이다. 현재까지도 피의자의 정신상태 등의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실 그전부터 수차례,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계속 있어왔다. 후속대책을 요구하고, 서로 더욱 조심할 것을 되새기며, 그저 그렇게 지나쳐오던 우리 사회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갑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1004장의 추모 포스트잇을 텍스트로 정리해 분석한 결과, 여성들은 그동안 겪었던 불안과 공포를 드러냈고 피해자에 대한 강한 동일시와 깊은 공감을 나타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전반적인 사회 안전에 대해 ‘불안하다’고 느끼는 여성은 50.9%에 달하고, 주된 불안 요인은 범죄 발생(37.3%)이었다. 여성들은 사건 이후, 지금까지 자신만 겪었을 것이라 여기던 공포와 사건들을 공통적으로 경험한 ‘여성 혐오’라는 말을 통해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 반복되는 사고와 개별적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은 이 사건을 통해 수렴했다. 이제 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출처:  IS AWESOME


누구에게는 당연한 것, 누구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


올해 초, 이사할 자취방을 알아보러 이리저리 쏘다녔다. CCTV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경비아저씨는 계신지, 방범창과 이중 잠금장치, 빗장은 설치되어있는지, 집 주변 길이 너무 어두운 것은 아닌지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몇 번이고 부동산을 들락날락한 후에 그제야, ‘그나마’ 괜찮은 집을 택했다. 이렇게, 집을 구할 때는 당연히 안전이 최우선이지! 확신하던 나는 한 달 전 남자 친구의 집에 들른 후 생각이 흐려졌다. 어두운 골목, 상가 옆에 문이 하나 나 있다. 그 문을 열면 바로 방이 보인다. CCTV도, 이중 잠금장치도, 빗장도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 친구는 집이 무섭지 않은지 물어보는 내게, 어차피 집에 침입하려는 사람이 잘못된 거고 오히려 자신한테 죽을 거라며 웃으며 말했다.


어? 뭔가 이상하다. 이거 당연한 건데…


사회는 알게 모르게 여성들에게 주의하고 조심하는 삶을 강요하고 있다. 작년 말까지 자주 지나는 지하철 엘리베이터 밑에 <몰래카메라 주의>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전혀 이상할 것 없이 지나쳐가던 표지판이었는데, 한날 문득 보니 엑스 표시의 낙서가 생겼다. ‘주의’라는 말은 엑스 쳐지고 대신 ‘금지’라는 말이 옆에 쓰였다. <몰래카메라 금지>. …아 원래 몰래카메라는 주의해야 하는 게 아니고, 애초에 금지해야 하는 거잖아?


출처: https://blog.naver.com/silknsticker
출처: 오마이뉴스, 황소연 기자


반복된 경험으로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의’하고 ‘조심’하는 삶을 내재화한다. 주의하고 조심하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니 결국 진위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문제의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돼있었다.


“그러게 옷을 얌전히 입었어야지.”, “네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 아니냐?” …


화장실에서 조심해야 하고, 길에서 조심해야 하고, 심지어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도대체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는 없다. 몰래카메라(불법 카메라)는 주의하는 것이 아니라 금지해야 하는 것이고, 여성의 옷차림을 규제할 것이 아니라 성범죄를 규제해야 하는 것이고, 피해자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잘못한 것이다.


출처: 뉴시스, 인지혜 기자


나는 중학생 때 친구와 놀고 집에 가는 길, 따라오던 남자에게 가슴을 만져지는 추행을 당했다. 남자는 뒤에서 나를 제압해 끌어안아 가슴을 주무르고는 달아났다. 15살이었던 내게 수치스러움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그대로 조용히 살해당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던 그 조용하고 서늘한 밤공기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주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주변을 심하게 경계하며 걷는 습관이 생겼다.


신고를 하고 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왜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냐는 말을 들었고, 당시 동갑의 남자 친구에게서 사실 좋았던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 얼버무렸다. 모든 게 교복 치마를 짧게 줄인, 조심하지 않고 늦은 밤길을 다닌,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바보 같은 내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내 책임이었으니까 그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출처: 연합뉴스 TV


그러던 내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말하기를 결심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이제야, 더 이상 내가 주의하고 조심할 문제가 아니며 조심하지 않았던 내 탓이 아니란 것을 안다. 이제야, 오롯이 가해자의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야피해자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안다.


“밤늦게 다니지 말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너무 튀지 말고, 사람들한테 잘해주지 말고…”


딸의 조심을 당부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어서 오길 바란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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